문화/생활

인조반정은 1천5백여 명의 군인과 오합지졸 민간인만으로 정권을 바꾼 사건이다. 일부에서는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 운운하지만 이런 소수의 반란군에게 정권을 빼앗긴 임금이 어떻게 외교를 잘할 수 있었을까? 탁월한 외교전략가였다는 식의 재평가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조반정 때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8백명 정도 되는 정규군을 이끈 이서(李曙·1580-1637)다. 당시 그는 장단부사로 있었고 그 병력은 장단군에 소속된 군인들이었다.
이서는 효령대군 7대손으로 왕실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왕실사람은 아니었다. 5대까지 내려가면 친진(親盡), 즉 왕실 종친으로서의 자격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무장이었고 이서도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서가 서인들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서인의 실력자 이항복 밑에서 비장(裨將)으로 일했고 또 하나는 서인으로 무신집안 출신인 신경진과 둘도 없는 친구였다. 신경진은 신립의 아들이다.
여러 지역의 현감과 군수를 거치며 승승장구하던 이서는 광해군 10년(1618) 인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당시 조정에서는 인목대비 폐출론이 거세게 일었다. 서인들은 당연히 이에 반대했고, 남인들도 서인을 거드는 가운데 광해군을 둘러싼 대북파는 인목대비의 폐비를 추진했다. 이서는 무신으로서는 드물게 인목대비 폐출론을 반대하는 쪽에 섰다. 그리고 얼마 후 모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그는 다행스럽게도 대북파의 미움은 덜 받았다.
상복을 벗은 이서는 장단부사로 복직했다. 실은 벼슬에 나가서는 안 되지만 신경진 등과 이미 이때부터 모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 장악을 위해 관직을 맡은 것이다. 1623년 3월 13일 마침내 거사가 있게 되고, 이서는 장단의 병사를 인솔하고 홍제원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김류·이귀 등과 합세하여 광해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당연히 그는 1등 공신에 올랐고 곧바로 호조판서에 오른다. 무신이 판서가 된다는 것은 이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어 그는 경기도관찰사로 나간다. 이 또한 이서가 비록 무인이기는 하지만 이재(吏才)를 인정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인조2년(1624)같은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토벌작전 초기 관찰사 겸 부원수인 이서는 적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전진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서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남한산성 수축은 바로 그의 건의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는 인조에게 “백제가 고구려와 싸우면서 이곳에 성을 수축했던 이유는 그 지형지세가 수도를 방어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고 말해 재가를 받아냈고, 그리하여 얼마 후 인조가 피신하게 되는 남한산성의 축조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병조판서에도 올랐던 이서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함께 들어가 방어전략을 지휘했고 과로로 이듬해 초 숨을 거둔다. 그는 사위 채유후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죽어도 한이 없으나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은 패하여 당한 치욕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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