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서울의 동대문구 답십리동 신답사거리에서 중랑구 면목동 용마산길에 이르는 길이 3.2킬로미터의 거리 이름이 사가정길이다. 사가정(四佳亭)은 조선초 학자이자 관리이며 우리에게는 <동문선(東文選)>의 저자로 귀에 익숙한 서거정의 호다. 그가 용마산을 지나 아차산 앞 자리에 살았다고 해서 생긴 길이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세종 말 문과에 급제해 45년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임금을 모시며 6판서를 거쳤고 30년 동안 문형(文衡)으로 활약했다. 문형은 당대 최고의 문필가라는 뜻이다. 그는 대제학과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시관(試官)만 23년을 지냈다. 글에 관한 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소리를 들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실록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배를 장려하여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은 그 때문에 서거정을 작다고 여겼다”고 평하고 있다. 전형적인 재승박덕(才勝薄德)의 인물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권근(權近·1352~1409)이다. 따라서 한명회(韓明澮)와 더불어 수양대군을 세조로 옹립하는 데 앞장서게 되는 권람(權擥)은 그의 외사촌 형님이고 누님의 남편, 즉 자부가 ‘집현전학사’로 유명한 최항(崔恒)이다. 학문지향의 만만치 않은 가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서거정의 학문수업과 관련해 눈길이 가는 인물은 유방선(柳方善)이다. 유방선은 서흥부원군(瑞興府院君) 유기(柳沂)의 아들로 일찍이 권근 변계량(卞季良)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강원도 원주 근처 자망산에서 제자들을 길렀으며 한명회·권람·서거정 세 사람이 바로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유방선은 정몽주-권근-변계량으로 이어지는 ‘영남 성리학’의 학통을 이어받아 후대에 전수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유방선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한명회·권람·서거정 세 사람은 이 때부터 커다란 포부를 품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서거정은 세조·성종 대를 거치면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본인의 능력 못지않게 당대 최고의 실력자 한명회의 후원이 늘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서거정이 사간원 우사간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세조가 대궐 후원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활쏘기를 하고 있는데 서거정이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굳이 정사를 행하려면 대궐의 정전에서 해야지 야외에서 활쏘기나 하면서 정사를 행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느냐는 비판이었다.
세조는 기분이 상해 예조판서 이승손을 불렀다. “서거정의 말이 매우 오만방자하다. 내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때 이승손이 기지를 발휘해 “서거정의 말이 지나치기는 했지만 옛말에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했으니 지금은 전하께서 밝으시니 서거정이 저런 곧은 말도 한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둘러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학재(學才)가 워낙 출중했기 때문에 세조는 서거정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거정은 세조 때 이미 육조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또한 세조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 편찬에도 적극 참여했다. 다방면의 학식에 관한 한 양성지 정도가 비교될 수 있을까? 다만 실록 사관의 촌평대로 속이 좁았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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