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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가늘고 길게~ 소나기는 꼭 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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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ulbi1지난 호에 이어 역사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인물을 이야기해 보겠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 그의 할아버지 심정(沈貞)은 중종 때 조광조를 죽인 배후인물로 사림들 사이에 증오의 대상이었다. 심수경은 명종1년(1546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하며 선조 때 좌의정에까지 오르게 되는데 사림들의 세상이 열린 선조시대, 특히 당쟁이 생겨나 격화되던 시기에 어떤 태도로 임했기에 무탈하게 정승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는 흥미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먼저 그가 거쳐 간 관력(官歷)부터 보자. 이조좌랑과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1562년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다. 대사헌, 대사성을 지낸 그는 다시 조선 팔도의 관찰사를 두루 지낸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관찰사를 여러번 지냈다는 것은 임금의 총애와 더불어 관리로서의 재능이 뛰어났다는 뜻이다. 게다가 중앙에서는 당파싸움이 한창일 때 지방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당쟁에 휩쓸릴 가능성도 그만큼 적었다. 그래서인지 북인이 쓴 <선조실록>이나 서인이 고쳐 쓴 <선조수정실록>에서 좌의정까지 지낸 그의 졸기(卒記)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좌의정을 지낸 심수경이 죽었다.’

이게 전부다. 그러나 심수경은 생전에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다 누렸다. 병조판서를 거쳐 74세 때인 1590년 우의정을 지낸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2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의병모집을 이끌었고 좌의정에 오른 다음 80세가 넘은 1598년에야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역사는 그가 “심정의 손자였지만 선대의 허물에 대해 늘 부끄러워하고 몸가짐을 삼갔기 때문에 핵심요직을 두루 지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인생 말년에 쓴 그의 문집 <견한잡록>을 읽어 보면 세상을 조금은 거리를 두고서 지켜보던 그의 성품 또한 그의 성공적인 벼슬살이에 큰 기여를 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은근한 자기자랑이 밉지가 않다.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옛날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朴淳)은 겨우 50세에, 유전(柳琠)은 55세에, 이산해(李山海)는 50세에, 정철(鄭澈)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金應南)과 이원익(李元翼)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욕되게 한 일이라고 했지만 자부가 느껴진다. 이런 은근한 자부는 또 있다.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文士)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는데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壽)는 최고이다.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번째 요행이고, 급제한 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아마도 권력무상을 할아버지 심정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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