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1

 

2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여섯 살 때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고 광해군 때 일개 유생의 신분으로 당시의 권력자 이이첨을 지목하여 비판했다가 함경도와 경상도 등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남인에 속했던 윤선도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고서야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윤선도는 초야에 머물러 있다가 마흔두살 때인 1628년(인조6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어 두 왕자를 보도하였다. 특히 봉림대군은 훗날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기에 이 인연은 윤선도에게도 각별한 것이었다.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윤선도는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어 소현세자의 학문을 보도(輔導)하게 되었는데 세자 주변에서 “윤선도가 몰래 모략을 꾸미니 앞으로 세자에게 이롭지 못하리라”는 유언비어 파문으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다. 윤선도에 대한 서인들의 견제는 이처럼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638년 병자호란 때 윤선도는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나아갔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주도로 내려가다가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이르러 이곳에서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그 사이 조정에서는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윤선도가 가르친 적이 있던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효종이다. 효종은 윤선도를 불러올리려 했고 서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공작을 펼쳤다.

효종은 서인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선도를 한양으로 불러올려 승지, 예조참의 등에 제수했다. 하지만 나날이 목을 죄어오는 서인들의 공세 앞에서 윤선도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연일 귀향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를 올려 마침내 낙향을 하게 된다.

출사와 낙향을 거듭하는 가운데 윤선도는 어느새 남인을 이끄는 영수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장지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는데 예송논쟁이 그것이다.

왕실을 업신여겼던 서인들은 1년상이면 충분하다고 했고 왕실을 존숭하던 윤선도는 3년상으로 맞섰다. 윤선도의 패배였다. 결국 윤선도는 이듬해 ‘삼수갑산’ 하는 그 삼수로 유배를 가야 했다.

집권 초기 서인들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랐던 현종은 점차 예송논쟁의 속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서인들에 대한 견제의 시작임과 동시에 남인의 복권을 의미한다. 삼수에서 전라도 광양으로 위배돼 있던 윤선도를 풀어 주라는 명이 내려온 것이 현종7년(1666)이다. 그러나 이미 윤선도의 나이 여든이었기 때문에 현직 복귀는 불가능했다.

이때 사면된 윤선도는 바닷가로 들어가 5년간 살다가 1671년 8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누구보다 충직했으나 서인들의 견제에 이렇다 할 경륜을 펼치지 못한 윤선도는 그나마 시가들을 남김으로써 우리에게는 문인으로라도 기억되고 있다. 그의 호와 연관된 시 ‘고산(孤山)만이 홀로 항복하지 아니하였다’에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푸른 물결 문득 일어 푸른 바다인 양 드넓으니
긴 들과 큰 강을 분별할 수가 없구나!
어찌하여 이 산은 무너져 내리지 않았는가?
일천 구릉 일만 언덕이 순식간에 줄이어 항복했거늘….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