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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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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변하면서 우유처럼 신분이 급락한 식품도 없을 것이다. 옛날에는 왕실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우유가 지금은 상점에 지천으로 쌓여 있으니 말이다.

옛날의 우유는 임금의 보양식이었다. <인종실록>에는 병을 앓고 있는 인종에게 내의원에서 “상의 옥체가 몹시 쇠약하고 몹시 손상되시어 약으로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열(心熱)이 이미 일어났는데 다른 증세가 또 일어날까 염려스러워 신들은 몹시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전에 아뢴 타락(駝酪)을 이제는 반드시 드셔야 하겠습니다”라고 아뢰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타락이 바로 우유이다. 타락이라는 이름은 말린 우유를 뜻하는 돌궐어(突厥語)의 ‘토라크’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우유의 공급을 담당하는 유우소(乳牛所)라는 기관이 있었고 그것이 조선조에 와서 타락색(駝酪色)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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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에는 “인원이 2백명이나 되는 유우소를 혁파하고, 상왕전에 지공하는 유우는 인수부에 소속시키고, 주상전에 지공하는 유우는 예빈시에 소속시키게 하고, 그 여러 인원은 소재한 주·군의 군(軍)에 보충하게 하소서”라고 병조에서 건의하는 내용이 있다. 그 진언을 세종이 수용하여 유우소는 폐지되고 그 이후 타락색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동대문 부근의 낙산이 바로 타락색이 위치해 있던 타락산이다.

당시만 해도 조선 땅에는 젖소가 없어 우유는 소가 새끼를 낳았을 때만 한시적으로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할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우유를 그냥 마시기보다 죽이나 전약을 만들어서 먹었다. 타락죽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 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영조실록>에 나온다. “예전에는 자전(慈殿)과 대전(大殿), 세자궁에만 낙죽(酪粥)을 올렸다. 중궁전에는 을해년 이후부터 바치게 하였고, … 세손궁(世孫宮)으로 말하면 이미 책봉된 뒤에는 사체(事體)가 세자궁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진배하게 하였으나, 원손궁(元孫宮)은 왕자와 같은 신분인데 내의원이 잘못 알고 낙죽을 진배하였다.”

왕손이라도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 타락죽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귀한 타락죽을 가끔은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했던 모양인데 조선초기의 문신 서거정은 그 영광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기기도 했다.

감히 성상의 지극한 은총을 입어 (謬承天寵極)

날마다 내주의 타락죽을 먹노라니 (日食內廚?)

옥처럼 깨끗한 데다 빛은 더욱 맑고 (玉潔光尤瑩)

서리처럼 엉긴 게 맛 또한 고소하네 (霜凝味更?)

지극한 은총이 우로처럼 깊어라 (至恩深雨露)

큰 은택이 살갗을 흠뻑 적셔 주누나 (?澤浹肌膚)

분골쇄신으로도 못다 갚을 테라 (粉?思難報)

늘상 만수무강이나 외칠 뿐일세 (尋常萬壽呼)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던 세도가 윤원형 같은 이는 그렇게 가끔 얻어먹는 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지 궁에서 재료와 도구를 가져다 집에서 타락죽을 끓여 자녀와 처첩들까지 먹이다 탄핵상소문이 올라가는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규합총서>에는 타락죽 요리법을 “물에 불린 쌀을 맷돌에 갈아 체에 밭쳐 앙금을 가라앉힌 다음 그것으로 되직하게 죽을 쑤다가 거의 익었을 때 우유를 앙금보다 좀 많이 부어 뭉근한 불에서 고르게 섞으면서 끓인다”고 했다. 올 겨울에는 집에서 타락죽을 넉넉하게 쑤어 왕실가족처럼 나눠 먹으면 어떨까.

글·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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