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강희맹(姜希孟·1424~1483)은 조선초 대표적 화가이자 서예가로 유명한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이다. 두 사람의 아버지 강석덕(姜碩德·1395~1459)은 세종대왕의 동서였으니 강희맹 형제에게 세종은 이모부였던 셈이다.
아버지 강석덕은 평소 “내가 예순이나 되었는데 공을 세우거나 재산을 모으는 데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일을 행함에 있어 권모나 사기를 쓰지 않았으니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자부했던 사람이다. 그의 이 같은 성품은 그가 두 아들에게 지어 준 이름에서도 나타난다. 강희안의 경우 공자의 수제자 안회(顔回)를 본받으라는 뜻으로 지었고 강희맹의 경우에는 맹자(孟子)를 본받으라고 해서 이렇게 지었다.
형 강희안이 예재(藝才)에 뛰어났다면 아우 강희맹은 문재(文才)가 출중했다. 강희맹은 스물네 살 때인 1447년(세종29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선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원종공신이란 정변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고 후원세력으로 분류됐다는 뜻이다.
세조는 관리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을 종종 실시했는데 그때마다 강희맹은 1, 2위를 차지해 세조의 총애를 받아 예조판서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역사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시류의 흐름을 잘 탔다고 할 수 있다. 예종 때 남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됐고 성종 즉위 때도 그 비정상적 과정을 ‘묵인’함으로써 좌리공신 3등에 책록됐다. 익대공신 추대와 관련해서는 다소 불미스러운 기록이 실록에 전하기도 한다.
“남이가 죽고 예종이 논공행상을 하는 과정에서 유자광 등에게 익대공신을 내리자 강희맹은 처음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글을 올려 스스로 그 공을 열거하여 3등에 책록됐다.”
여기서 보듯 강희맹은 강직함보다는 노련함과 왕실의 배경이 출세의 밑거름이었다. 물론 그의 특출난 문재도 한몫했다. 성종 때도 임금의 지극한 총애를 받자 이를 견제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익명서를 올려 그를 참소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성종은 “나는 경을 의심하지 않고 경은 나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며 신임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관작을 더 올려 주었다.
실록은 한편으로는 그를 크게 칭찬한다. “경사를 널리 열람하고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다. 예제를 정할 때에 문장이 정밀하고 깊이가 있으며 속되지 않았는데 종이를 잡기가 무섭게 곧 문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행실 면에 대해서는 사관의 평이 날카롭다. “평생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은총을 갈구하였다. 세조가 금강산에 거둥하였을 때 이상한 새가 있어 하늘가를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세조가 부처의 힘이 신묘하게 응한 것이라 하였는데 강희맹이 서울에서 이 말을 듣고 ‘청학송(靑鶴頌)’을 지어 바쳤다.”
오죽했으면, 이런 식으로 종종 강희맹이 과장된 글을 지어 올리자 처음에는 좋아했던 세조조차도 “이런 글을 사람들에게 들려줘서는 안되겠다”고 했을까? 학식은 뛰어났으나 학덕은 모자랐던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사관은 최종적으로 이렇게 평한다.
“비록 문장은 아름다웠으나 (행실 면에서는) 무엇을 취하랴?”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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