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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우리 역사에서 1980년대가 차지하는 자리는 특별하다. 오늘의 상식으로 보건대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잇달아 터진 연대이다. 1960년대산인 내가 이 시대를 회고한다면 어떤 풍일까. 비장이라는 낱말이 적절할 터이다. 그렇다면 1970년대산 작가들이 이 일을 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나이 또래라면, 1980년대를 청소년의 시각으로 보았을 터이다. 일면 어수룩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조숙하기도 한 시각이다. 참여하기보다는 지켜보는지라 냉소적일 수도 있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앞서는지라 경악하고 경탄했을 성싶다.

그렇다면 이들 세대가 그리는 80년대 풍경은 사뭇 다르리라. 날렵하고 경쾌하고 가볍고 기발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한낱 추측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으니, 김연수의 <원더보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그려낸 80년대만 따로 추린다면, 선배작가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일상화한 국가폭력과 이에 희생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뼈대를 이루니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르다. 마치 명랑만화를 보듯 미소를 띠며 읽어나갈 수 있어서다.

아버지와 함께 트럭을 타고 귀가하던 아이(김정훈)는 정면충돌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천만다행 소생했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소년은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얻었다.

코미디인 것은, 사고를 낸 상대방이 도주하던 고정간첩이었는데 아버지가 이를 알고 육탄으로 저지했다고 과장, 왜곡해 널리 선전했다는 사실이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더욱이 작가의 장난기가 발동해 한 인물이 말하는 가운데 품은 속마음을 문장으로 표현해 놓았다. 처음에는 이상하지만 금세 작가의 의중을 눈치채게 된다. 그러나 희극만 있지는 않다. 권 대령으로 상징되는 타락한 권력이 이 능력을 악용한다. 어찌 그 시절을 희극으로만 그려낼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의 또 다른 얼개는 엄마 찾기다. 아버지가 도통 엄마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엄마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나온다.


철새를 연구하는 여대생과 밀렵꾼이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정을 꾸리지는 못한다. 전직 해직기자(재진)의 도움으로 엄마의 이름을 확인하는 수준에 이른다. 그런데 작가는 주인공이 엄마를 찾아나서게 하지 않는다. 혈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시대정신을 공유하는, 곧 가정을 이룰 연인(재진과 희선)을 마음의 부모로 받아들이게 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겼다. 1980년대는 과거의 어떤 가치를 회복하려는 몸부림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치열하게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은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게 됐다. 아마도 이 큰 그림을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원더보이> 말미에서 작가는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기실 이 문구에 이 작품의 주제가 담겨 있다. 원더보이가 절망의 삶을 보냈던 것도 그만큼 어렸기 때문이고 성장가능성이 있어서였다.

80년대의 비극 역시 민주적인 삶의 시간대가 짧아서였고 그만큼 더 많은 성취가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이 작품은 두 가지 의미에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는 전형적으로 한 소년이 방황과 갈등을 거쳐 성인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이 자체가 우리 사회의 성장에 대한 우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아무에게나 원더보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절망을 이겨내고 성장한 이들에게 원더보이라 한다. 작가는 80년대를 산 모든 이에게 원더보이라는 찬사를 바치고 있는 셈이다.(뱀다리 하나. 작품 맨 마지막 단락은 “그리고 1978년 여름이 되자”로 시작하는데, 1978년은 1987년의 오식이다.)

글·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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