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이석형(李石亨·1415~1477)은 세종 23년(1441)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생원시, 진사시에 이은 조선 최초의 ‘3시(試)’ 장원급제자였다. 장원급제자는 첫 벼슬을 6품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석형 또한 사간원 좌정언이 되어 벼슬길에 오른다.
당시 그의 문과급제 동기생 중에는 훗날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김국광(金國光)을 비롯해 양성지(梁誠之) 김수온(金守溫) 강희안(姜希顔) 등이 있다. 세종 시절 주로 집현전에서 순조롭게 관직생활을 했고 문종 때는 세자(훗날의 단종)의 교육을 책임지는 자리에도 오를 만큼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으나 그도 역사의 파고를 피해갈 수 없었다.
계유정란과 그에 이어지는 세조의 집권이다. 여기서 그는 바로 상관이던 성삼문이나 하위지 등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애초에 이석형은 수양대군과 가깝기도 했다. 세종 때 함께 <병요(兵要)>라는 군사서를 편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석형은 정치성향이 강하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 조심했는지도 모른다.
세조는 이석형을 아꼈다. 특히 지방관리로서 그의 이재(吏才)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세조 때 이석형은 전라도관찰사를 시작으로 해서 공주목사, 한성판윤(漢城判尹·지금의 서울시장), 황해도관찰사 등을 두루 지냈다. 이후에도 경기도관찰사와 한성판윤을 다시 지냈는데 도합 7년 동안 한성판윤을 지냈다. 요즘으로 치면 관선 서울시장을 7년 동안 재임한 것이다.
세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석형은 판서를 거쳐 정승의 자리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세조는 평소 이석형을 불러 술자리를 자주 하면서 “경은 한성판윤 자리를 너무 오랫동안 맡겨둔다고 원망하지 말라. 내 반드시 크게 대우하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이석형은 동료들의 견제 때문이었는지 중책은 맡지 못하고 중추원의 이름뿐인 고위직을 역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돌이켜보면 이석형은 태평성세와 난세를 함께 살아낸 조선 최초의 엘리트 관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선후배 동료들이 사육신이 되고 생육신이 될 때 묵묵히 자기 앞만 보고 걸었다. 자리에 대한 과욕을 부리지도 않았다. 이런 절제 때문에 그는 훗날 성삼문처럼 크게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다. 신숙주만큼 욕을 먹지도 않았다.
이석형은 학식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는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鄭保)의 사위로도 유명했다. 특이하게도 이석형의 묘는 처가 집안인 영일 정씨 집안 묘역에 있다. 정몽주의 묘소 근처에 그의 묘가 있다.
이석형은 2남1녀를 두었는데 외동 사위가 송여해(宋汝諧)다. 성종과 연산군 때의 중견관리였던 송여해의 이름이 유명해지게 되는 것은 먼 훗날 송시열로 인해서다. 송시열은 은진 송씨로 연산군에 대해 직간(直諫)을 서슴지 않다가 유배를 가는 송여해의 6대손이다.
느슨하게나마 정몽주~이석형~송시열로 이어지는 인척(姻戚)의 학맥을 떠올려보는 것도 역사 읽기의 한 재미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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