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중·고등학교 시절 정학 바로 아래의 처벌이 근신(謹愼)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 근신은 모든 신하의 마땅한 도리였다. 현대인들은 근신했던 인물보다는 정도전처럼 왕권에도 도전하는 모습을 좋아하지만 당시로 돌아가 본다면 왕권에 도전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근신하는 자세를 보여준 인물이 수없이 많지만 여말선초(麗末鮮初)라는 격변기에 근신하며 바른 길을 걸으려 노력했던 사람으로 김여지(金汝知·1370~1425)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스무살이던 1389년(고려 창왕 1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곧바로 사헌부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말을 과격하게 하다가 전라도로 잠시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러나 심각한 일은 아니었던지 이듬해 풀려나 사간원에 복귀했고 이때 정도전과 악연을 맺게 된다. 정도전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본인이 파면당했다.
이로 인해 조선개국 과정에서 김여지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1392년(태조 1년) 경주를 관할하는 계림부 판관으로 있을 때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근처로 유배 온 이종학을 온 몸을 다해 구했다.
이종학은 김여지를 과거에서 뽑아준 좌주(座主)였다. 조선시대 들어 엄격히 금지됐지만 고려 때 좌주와 문생의 관계는 부모 자식 관계보다 끈끈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도전이 그냥 두지 않았다.
조정에서 말하기를 “공양왕 때 나를 탄핵했던 언관들은 다 파직됐는데 김여지만이 관직에 그대로 있다”고 한 것이다. 모든 권세가 정도전에게 집중돼 있던 시절이다.
그날로 김여지는 병을 핑계로 사직한다. 어린 나이에 문과 장원을 차지했으니 그의 능력은 특출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여지는 정도전에 맞서기보다는 숙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죽자 김여지는 태종의 총애를 받는다. 그는 이래(李來)와 함께 세자 양녕대군의 교육을 책임졌다. 양녕이 폐세자될 때까지 사부로 있었다. 동시에 그는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지신사(훗날 도승지)에 오른다.
그 후 김여지의 관리생활은 외형적으로 순탄했다.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공조판서, 한성부판사(서울시장), 형조판서 등을 거쳐 1425년(세종 7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실록은 그가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충성스럽고 근신하여 정승의 틀이 있었는데 크게 쓰이지 못하고 죽어 당시 사람들이 애석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승감이었다는 말이다.
그는 죽기 직전 두 아들에게 <계자서서(戒子壻書)>라는 글을 남겼다. 아들과 사위에게 주는 경계의 글이라는 뜻이다. 그중 일부다.
“내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본받을 말을 알지 못하여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만한 행동을 많이 했다. 이제 뉘우친들 무엇 하겠느냐? 너희들은 나의 이 말을 거울로 삼아 매사에 경계하도록 하라.”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근신하는 태도를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평범하면서도 요즘 같은 우리 사회 분위기에서는 절실하게 다가온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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