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조선 초 어의(御醫)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은 양홍달, 양홍적이다. 이들은 서로 형제지간이거나 적어도 사촌형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출신은 모두 어머니 쪽이 노비여서 천례(賤隷)였다고 한다.

양홍달은 태조 이성계의 어의였다. 특히 의술이 뛰어나 정종이 직접 “양홍달과 양홍적은 태상왕(이성계)께서 심히 사랑하시고 나도 이들을 형제같이 본다”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양홍달은 고려 말부터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신임해 어디를 가건 늘 데리고 다녔다.

태종 즉위와 함께 매일 대궐에 출근해 왕실 사람들의 병을 돌보았다. 태종4년 그의 직위는 공조전서, 즉 공조판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사간원에서는 가계(家系)를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내쫓으려 했지만 태상왕의 명이 있었기 때문에 태종은 사간원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407년에는 세자인 양녕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수행했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전의감 판사로 승진해 1412년에는 태종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난산을 잘 보살폈다고 해서 검교 한성부 윤이 되었다. 검교란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따라서 명예 서울시장에 올랐다는 뜻이다.

그는 왕실 사람들뿐만 아니라 태종이 총애했던 하륜 박석명 황희 등의 질병도 구료했다. 연일 뛰어난 치료성과로 승승장구하던 양홍달은 그러나 1418년 세상을 떠난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의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고 해서 박거·조청·원학 등 동료 의원들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된다. 모진 고문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곧 풀려난 양홍달은 태종 때 이미 ‘노의(老醫)’로 불릴 만큼 나이가 많았으나 세종13년까지 의원으로 활약했다.

양홍달의 두 아들 양제남과 양회남도 아버지에게 배워 의술이 뛰어났다. 특히 양회남은 어릴 때부터 세종과 가까이 지내면서 건강을 보살펴 천인신분을 벗고 양인이 되었으며 세종13년 세종은 양제남에게도 3품직을 내려 주었다.

동생 양홍적은 형과 달리 부침을 겪었다. 양홍적은 태종3년에 일어난 조사의의 난에 연루되었다. 조사의는 태조의 지시로 태종을 내몰기 위해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태조의 배려로 처벌은 면할 수 있었다. 또 의술이 뛰어나 태종도 그를 아꼈기 때문에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다시 의원으로 궁궐에 들어오지만 그의 내의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태종8년 그는 왕을 잘못 치료해 하옥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다행히 태조가 풍질에 걸렸을 때 이를 잘 치료해 왜인 출신 의원 평원해와 함께 상을 받는다. 태종12년에는 양홍달과 함께 원경왕후의 난산을 잘 보살펴 검교 공조참의에 오르고 공신전까지 받았다.

두 사람보다 조금 늦은 시기, 즉 태종과 세종 전반기에 활약한 양홍수도 두 사람과 형제 혹은 가까운 친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홍수는 주로 조선을 찾던 명나라 사신들을 치료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세종5년 8월에는 명 사신 진경을, 다음해에는 이낭중의 병을 치료했고 그후에도 창성·윤봉 등 조선을 찾았다가 병이 난 사신들의 병수발을 도맡았다. 어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세종22년에는 대호군이라는 무관직을 하사받고 왕비나 금성대군의 질병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