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지금도 세종 때의 인물 장영실을 조선 최고의 발명가라거나 측우기의 제작자 등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필자는 예전에 어떤 글에서 장영실은 과학자라기보다는 금속전문가임을 실록을 근거로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구전이나 문집 등에 부정확하게 전해 오던 자료를 근거로 여전히 장영실을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자칫 장영실을 높이려다가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이룩한
신분한계의 극복 때문에 우상화의 유혹을 느끼는 듯한데 그렇더라도 사실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세종실록 15년(1433년) 9월 16일자에 장영실(蔣英實)의 승진을 둘러싼 세종과 정승들 간의 논쟁이 실려 있다. 여기에 먼저 장영실의 출신이 나온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고려 말 원나라(중국의)의 소주나 항주에서 온 중국사람이며 어머니는 (동래의) 기생이다.”
이날 조정회의의 안건은 장영실의 공적을 감안하여 그를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호군(護軍)에 임명하려는 세종의 뜻에 대해 정승들이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었다. 결국 세종의 뜻이 관철돼 장영실은 기생의 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군의 자리에 오른다.
장영실은 출신을 감안할 때 중국어도 할 줄 알았을 것이고, 아마 그 아버지도 금속에 능한 장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영실은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았던 것 같다.
일찍이 세종 7년에 장영실은 경상도 동래현 관노라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미 병조에 속한 정5품관 ‘사직(司直)’에 오른다. 이는 장영실이 세종 때 벼락출세를 한 것이 아니라 태종 때 이미 발탁되어 금속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실록에 나온다. 호군에 오른 장영실은 이듬해(1434년) 누기(漏器)라는 물시계를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그렇다고 물시계 자체를 장영실이 설계한 것은 아니다. 핵심 설계구상은 세종이 직접 한 것이고 장영실의 공은 세종의 의도를 1백퍼센트 실현한 데 있었다. 그리고 이천이나 김조 같은 문신들이 세종과 장영실을 중재하며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세종은 누기를 만든 바로 다음 날에 장영실을 불러 중추원 지사 이천의 지시를 받아 책을 인쇄할 수 있는 활자를 만들 것을 명한다. 이때 만든 주자(鑄字)가 20만 개다. 이 역시 금속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금속활자를 장영실이 만들었다고는 하지 않는다.
세종 19년에는 중국의 금속전문가들이 북방오랑캐에 포로로 있다가 조선으로 도망쳐 오자 즉각 장영실을 파견해 그들로부터 금은 제련기술을 익히도록 명한다.
이처럼 장영실의 경력은 일관되게 세종에 의해 금속전문가로 길러졌다. 계속적인 성공으로 장영실은 호군에서 대호군으로 승진한다. 당시 군 서열이 부호군·호군·대호군 상호군이었음을 감안하면 오늘날 중장의 지위에 오른 셈이다.
그런 장영실도 세종24년 4월 자신이 제작 감독한 임금의 가마안여(安輿)가 부서지는 일로 인해 파직당했다. 그 후 장영실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영 사라졌다. 지금부터라도 장영실은 발명가보다는 금속전문가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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