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변중량(卞仲良·1345~1398)과 변계량(卞季良·1369~1430)은 어지간한 부자 사이만큼 나이 차이가 많지만 형제다. 두 사람의 아버지 변옥란은 고려말 호조·이조·병조 판서를 두루 지냈고 밀양변씨는 고려의 명문가 집안이기도 했다.
형 변중량은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사위이자 정몽주의 문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그의 길이 평탄치 않았음을 예감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변중량은 조선개국에 참여하였으나 특정한 성향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장인의 이복동생 이성계를 돕는 차원에서 자신의 정치노선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가 당시 정도전이나 남은을 가차없이 비판한 데서도 그의 독자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중량은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참살을 당했다. 든든한 배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데 따른 불운한 관직생활의 전형이다.
그런데 스물다섯 아래의 동생 변계량은 형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그도 형과 마찬가지로 정몽주에게 배웠으나 조선 건국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실은 건국 무렵 그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정치적 풍파에 휩쓸리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히려 그는 형 변중량을 참살한 태종으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다. 예조판서에 올랐고 당시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처리하며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도 태종의 신임덕이었다.
그는 현실감각도 뛰어났다. 실록의 한 대목이다. “정유년(1417년)에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예조판서로 옮겼다가 곧 의정부 참찬이 됐다. 그 다음해에 왜놈들이 우리나라 남쪽 변경을 침략하여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함이 심했는데 태종대왕이 변계량의 말을 받아들여 정벌하기로 하였다.” 즉 태종과 세종의 대마도정벌의 주창자가 바로 변계량이었던 것이다.
특히 세종 때에는 공정한 과거시험 제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실록은 변계량으로 인해 그때까지 남아 있던 고려시대의 부정적인 과거풍습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평할 정도다. 그는 학술과 관리에 모두 뛰어난 보기 드문 인재였던 것이다. 다시 실록이다. “일을 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이따금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극찬이다.
그러나 실록의 사관은 엄정하다. 그가 죽었을 때 실록이 기록한 그의 졸기(卒記) 일부다. “처음에는 철원부사 권총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버리고 또 오씨에게 장가들었다가 상처하고 이어 이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몇 달 만에 버리고 다시 도총제 박언충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중에는 아직 혼인상태이면서 새로 부인을 취한 경우도 있어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본부인으로부터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비첩으로부터 아들 한 명을 얻는 데 그쳤다.
그렇지만 조선 초 외교와 학술분야, 그리고 관리선발제도에서 변계량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기억돼야 할 것이다. 특히 세종의 문치에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참으로 크고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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