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서양의 경우 성서가 영어로 번역되면서 셰익스피어가 나올 수 있었고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괴테가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 있다.
이를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사서삼경>이 우리 말로 번역되고 나서야 정철에 의해 꽃피우게 되는 가사문학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훈민정음은 우리가 아는 대로 언문이나 암글이라 하여 비하의 대상이었다. 그런 ‘천한’ 문자로 <사서삼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자칫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사서삼경>의 우리 말 번역을 주도한 인물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7년(1574년) 10월 25일자에 보면 선조가 당대의 학자 유희춘과 <사서삼경>의 토와 번역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유희춘은 이황과 이이가 경서에 대한 풀이 작업을 많이 해놓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유숭조가 정해놓은 토가 진실로 잘 되어 있습니다.” 즉 <사서삼경> 번역의 기초가 되는 토 달기 작업의 원조로 유숭조를 지목한 것이다.
유숭조(柳崇祖·1452~1512)는 어찌 보면 시기적으로 아주 불행한 때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1452년이면 단종이 즉위하던 해다.
그는 세조 때 진사가 되기는 했지만 관리로서의 길은 늦은 편이었다. 마흔을 바라보던 1489년(성종20년)에야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고 불과 4년 후에 연산군의 시대가 시작됐다.
결국 그도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가지 못했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1504년 연산군의 실정을 극간하다가 원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리고 2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 조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사림의 정신을 이어받은 도학정치를 주장했다.
도학정치란 철저한 성리학적 세계관의 실현을 정치의 급선무로 삼는 것으로 조광조가 바로 그의 문하에서 도학정치를 배웠다. 그는 학문이 뛰어나 관리보다는 주로 국왕의 학문을 돕는 시강관이나 성균관 대사성으로 근무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실제로 유숭조는 시강관으로 있으면서 중종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현실정치 문제와 관련된 직언을 했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그만큼 왕권 중심보다는 신권 중심의 도학정치 실현에 대한 의지가 굳세었던 것이다. 그에 관한 신망을 보여주는 언급이 실록에 나온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가까이 돼가던 1530년 시독관 남세건이 중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유숭조는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정통했기 때문에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적에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항상 <역경>·<중용>·<대학>과 성리학에 관한 책들을 통독했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학교가 좁아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학교를 증축하자고 청했었습니다. 이것은 신이 직접 목도한 일입니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철저한 성리학 지상주의자가 <사서삼경> 번역의 토대가 되는 토 달기 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토달기에만 그치지 않고 번역(언해작업)으로까지 나아갔다. 필자는 아직 그 원본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저서 중에 <경서언해>가 포함돼 있는 것을 볼 때 유숭조의 작업은 이미 번역작업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번역 작업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인지 우리는 어지간한 전문서적 아니면 유숭조라는 이름을 접할 기회가 드물다. 지금부터라도 기억해야 할 인물 중 하나로 꼽아두었으면 한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