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율곡 이이는 일곱살 때인 1542년(중종37년)에 이미 <진복창전(陳復昌傳)>이라고 하는 짧은 전기를 썼다. 거기에서 이이는 진복창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내가 진복창이라는 사람됨을 보니, 속으로는 불평불만을 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려 한다. 그 사람이 만약 뜻을 얻게 된다면 나중에 닥칠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실록에 따르면 진복창은 1535년(중종30년) 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당대의 천재였던 셈이다. 3년 후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승진한 진복창에 관한 인물평이 나오는데 “사람됨이 경망하고 사독(邪毒)하다”고 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중종 말년까지 진복창은 외직을 떠돌며 이렇다 할 중앙관직을 얻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명종이 즉위한 직후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외삼촌 윤원형이 실권을 장악했다. 이때 진복창은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림세력을 제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훗날 그가 죽었을 때 실록의 사관은 그를 ‘독사(毒蛇)’라고까지 불렀다. 실제로 명종 때 진복창이 보인 행적을 추적해보면 오히려 ‘독사’라는 별명도 칭찬에 가까울 정도다.
을사사화 직후인 1545년 명종 즉위년 진복창은 사헌부 장령을 맡아 화려하게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요직을 오가며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핵하고 퇴출시켰다. 그의 뒤에는 윤원형이라는 당대 실세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명종3년 4월 19일 대사헌 구수담이 당대의 실력자인 좌의정 이기의 부정부패를 정면으로 탄핵하고 나섰다. 구수담은 사림으로 내외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고 진복창도 구수담에게 학문을 배운 바 있다. 이때 대사간인 진복창도 구수담을 거들고 나섰다.
한때는 이기에게 빌붙어 영화를 누렸지만 이기가 윤원형의 견제를 받기 시작하자 미련 없이 배반한 것이다. 진복창이 이기를 배반한 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원래 진복창이 첫번째 사헌부 장령이 될 때 힘써 추천한 이는 훗날 을사사화에 ‘공’을 세우게 되는 허자라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대사헌에 올라 실세로 떠오른 진복창은 이조판서 허자도 우습게 알기 시작했다. 결국 진복창은 허자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사림의 존경을 받고 있던 사람들까지 진복창의 공작에 의해 화를 입게 되자 홍문관 직제학 홍담을 비롯한 뜻있는 젊은 신료들이 들고일어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진복창의 손발 노릇을 하던 사헌부, 사간원까지도 돌아섰고 조정 대신도 진복창을 멀리 내쳐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해서 올렸다. 결국 윤원형은 진복창을 더 이상 보호하다가는 화가 자신과 누님 문정왕후에게도 미칠 것을 예감하고 진복창을 삼수(현 함경남도 삼수군)로 유배 보냈다. 삼수갑산의 그 삼수다.
그러나 삼수에 유배 간 진복창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백성의 땅을 빼앗고 공공연하게 뇌물을 요구하며, 심지어 집에 개인적으로 형틀까지 설치하여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불러다가 곤장을 치곤 했다. 결국 조정에 보고가 올라가 진복창은 가중처벌에 해당하는 가죄(加罪)를 받아 위리안치(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던 일)되었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문과 장원급제자로서는 너무나도 비참한 일생의 마감이었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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