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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목천 상(尙)씨는 2천여 명쯤 되는 작은 성씨라고 할 수 있다. 또 옛 문헌을 보면 원래 지금의 충청남도 목천 일대의 지방호족이었는데 고려 때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이유로 코끼리상(象)으로 성이 바뀌는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고 한다.

그 목천 상씨 중에 조선시대 영의정이 나왔다는 것은 그 인물이 여간 출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 중종과 명종 때의 문신 상진(尙震·1493~1564)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여러 모로 독특한 인물이었다. 진사시에 급제한 다음 성균관에서 동료들과 공부할 때 남들이 조신하게 몸가짐을 가지려는 것을 노골적으로 조롱하였다. 그 자신은 종종 선비의 상징이라 할수 있는 관(冠)도 쓰지 않은 채 두 발을 쭉 뻗고서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곤 해 동료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훗날 그의 발언 등을 통해 드러나듯 위선(僞善)에 대한 냉소였다. 이런 그를 눈여겨보는 이가 있었다. 중종 때의 명정승 정광필이었다.

문과에 급제한 상진이 인사를 오자 그를 만나 본 정광필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평했다. “앞으로 조정에 게으른 정승이 나오게 생겼다.” 칭찬이다. 아직 신진관리의 길에도 들어서지 않은 상진을 한눈에 알아보고서 ‘정승감’이라고 평한 것이다. 실제로 상진은 먼 훗날 영의정에까지 오르며 명정승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과연 그의 어떤 점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고 실제로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것일까? 위선에 대한 냉소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실록은 상진이 죽었을 때 그에 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도량이 있었으며 침착하고 중후하여 남과 경쟁하지 않았다. 또 평생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물론 이와 관련된 비판도 있다. 어떤 때는 집안 종의 말을 듣고서 청탁자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잘 들여다보면 상진의 세상을 보는 넉넉함을 읽어볼 수 있다. 사실 사람만 바로 되면 ‘자리라는 것은 거기서 거기 아닌가’ 라는 게 상진의 생각이었다.

우리에게는 ‘면앙정가’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송순이 그의 친구다. 하루는 상진이 송순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찌하여 이렇게 불우하고 침체된 삶을 살아가는가?” 직선적인 성품의 송순이 그로 인해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송순이 정면으로 맞받았다. “내가 자네처럼 목을 움츠리고서 바른말을 하지 않았다면 정승의 지위를 벌써 얻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상진의 대답은 울림이 크다. “자네가 입을 다물고서 직언을 하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불평스러운 말을 많이 하다가 이리저리 귀양이나 다니면 무슨 살맛이 있겠는가?”

이 말을 전해 들은 많은 선비들은 상진을 비난하기도 했다. 직책은 수행하지 못하면서 벼슬만 차지하여 봉록만 타먹는 썩은 선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상진의 인생관에 눈길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옳으니 그르니로 날을 지우다시피 하는 요즘 같은 때는 오히려 상진의 이런 여유로운 인생관이 청량제처럼 다가온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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