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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이숙번(李叔蕃·1373~1440)은 태종의 심복 중 심복이다. 1, 2차 왕자의 난과 태종 2년 조사의의 난 때 선두에서 무공을 날린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다. 그것도 조선 건국 후 처음 실시된 태조 2년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그에게는 무인(武人)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1차 왕자의 난 때 안산군지사(安山郡知事)로 있으면서 병력을 동원해 거사를 승리로 이끌었을 때 그의 나이 불과 스물여섯이었다.

실제로 태종 집권 18년 동안 정승을 지낸 하륜(河崙) 다음으로 큰 권세를 누린 인물이 바로 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차 왕자의 난뿐만 아니라 1400년 2차 왕자의 난과 1402년 태조 이성계를 위해 일어난 안변부사 조사의의 난을 진압한 1등공신도 이숙번이었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그도 1413년 병조판서를 지냈고 이어 의정부의 참찬과 찬성을 지냈기 때문에 정승에 오르는 일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나이가 어려서였을까? 이숙번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행동했다. 그가 병조판서를 지내기 4년 전인 1409년 43세의 태종은 두번째 선위파동을 일으킨다. 3년 전에 1차 선위파동을 일으켜 충성심을 테스트한 바 있던 태종이 다시 한 번 왕위를 세자 양녕에게 물려줄 것처럼 하면서 신하들의 충성심 테스트에 나선 것이다. 3년 전 피바람을 생생하게 기억하던 신하들은 이번에는 몸조심으로 일관했다.

이숙번도 나름 조심을 한다고 했다. 태종이 이숙번에게 세자에게 왕위를 넘길 뜻을 밝히자 이숙번은 “전하의 보령 50세가 되어 넘겨도 늦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아직 7년은 남았다고 생각한 이숙번은 무심코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즉 7년을 길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정확히 7년 후, 즉 태종이 50세가 되던 1416년 이숙번은 모종의 문제로 탄핵을 받아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를 갔다.

이숙번의 ‘잘못’이 무엇인지 살펴보려면 그 당시 하륜이 태종에게 했던 답이 어느 정도 지침이 된다. 노련한 하륜은 이렇게 답했다.

“주상의 보령이 60, 70이고 세자의 나이 30, 40이어도 불가할 텐데 하물며 지금 주상의 보령이 한창때이고 세자가 아직 어리니 불가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태종은 이숙번에게 사약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향후 어린 세종이 왕위에 오를 것을 대비해 이숙번의 권력은 철저하게 무력화시켰다. 실제로 이숙번은 죽을 때까지 이렇다 할 힘 한번 못 써보고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다만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지을 때 개국 초와 왕자의 난 때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여 세종은 이숙번을 대궐로 부른다.

세종 20년 말 한양으로 돌아온 이숙번은 두 달여에 걸쳐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증언한 다음 세종 21년 초 서울 근처 안성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게 된다. 신하들은 이숙번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경쟁적으로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은 묵살했다. 그리고 이듬해 이숙번은 숨을 거둔다. 1등공신이라도 처신이 올바르지 못할 경우 얼마든지 제2, 제3의 이숙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수도 없이 증명하는 바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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