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조선왕조실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진짜 뛰어난 임금은 누구였고 진짜훌륭한 정승은 또 누구였는가이다. 당연히 가장 뛰어난 임금은 세종대왕이다. 그러나 정승의 경우에는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누구라고 딱 찍어 말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사석에서 필자는 주저 없이 명종과 선조 때의 정승인 이준경(李浚慶·1499~1572)을 꼽는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참으로 격랑의 시절이었다. 연산군 말기에 태어난 이준경은 조선 초 최고 명문가의 하나였던 광주 이씨였다.
그의 할아버지 이세좌는 성종 때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하는 임무를 맡았던 승지였다. 훗날 판서에까지 올랐지만 연산군이 광기를 발휘하면서 첫번째 희생자가 됐고 그 바람에 홍문관 수찬으로 앞날이 창창했던 아버지 이수정마저 참형을 당했다. 1504년 갑자사화였다.
여섯 살 이준경은 한 살 많은 형 이윤경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중종반정으로 인해 유배에서 풀려난 이준경은 남들보다 늦은 1531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선다.
2년 후 홍문관 부수찬이 된 이준경은 조광조로 인해 발생한 기묘사화(1519년) 때 피해를 당한 사림파를 옹호하다가 권력자인 김안로에 의해 파직당한다. 이준경은 김안로가 제거되자 다시 관직으로 돌아온다.
중종이 죽고 인종에 이어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조정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545년 을사사화였다. 다행히 그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사화를 피해갈 수 있었다.
실은 그에 앞서 사림들이 명종 때의 최고실력자 윤원형의 형 윤원로를 지목하여 죽이려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준경이 적극 반대하여 좌절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에 대한 고마움에다가 이준경의 덕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윤원형이나 문정왕후는 이준경을 우대했다.
1555년 왜구들이 전라도 일대를 점령한 을묘왜변 때는 전라도순찰사가 되어 왜적을 퇴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마침내 영의정에 오른다.
이준경에 대한 일화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 지금도 종종 조선사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이 꼽는 이준경의 곧음과 관련된 일화는 아들이 홍문관 후보에 올라오자 그 자신이 앞장서서 “내 아이는 이런 재목이 못 된다”고 해서 낙방시킨 것이다. 이런 이준경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었다.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왕실의 적통은 끊어졌다. 그리고 중종의 후궁이었던 안씨의 손자 이균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위급한 상황에서 아무런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왕위계승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이준경이었기에 가능했다.
이준경은 자신이 고르다시피 한 새 임금 선조가 명군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이황이나 기대승을 불러들여 어린 선조의 학문 연마를 돕도록 했다. 그러나 선조는 머리는 좋았지만 자신감이 없었다.
선조 5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며 이준경이 선조에게 올린 유언상소는 절절하다. 그중 핵심은 “사사로운 붕당의 조짐이 있습니다”이다. 당쟁의 씨앗을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3년 후인 선조 8년부터 당파싸움이 본격화된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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