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풍태후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북위 황제의 후궁으로 공주를 달라고 요구했다. 일종의 외압이었다. 북위와의 통혼은 고구려의 내정과 지형을 노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과거 북량(北凉)은 북위와 통혼을 한 바 있다. 북량 왕 저거목건(沮渠牧)의 누이가 북위 황실에 시집을 갔다. 북량은 439년 북위에게 멸망했다.
장수왕은 35년 전(438년) 자신이 살해한 풍홍의 손녀로부터 혼사를 강요받은 것이다. 가해자인 장수왕의 입장에서 확실히 풍태후는 거북한 상대였다. 물론 이 같은 상황은 혼인 당사자인 헌문제도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헌문제와 풍태후는 북위 궁정 내부에서 암투를 벌이는 정적이었다. 막후 실력자로서 풍태후가 등장한 시기는 465년 문성제가 죽고 헌문제가 즉위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헌문제는 12세에 불과했다. 정치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당연히 권력을 행사할 위정자가 필요했다. 이때 그 지위에 오른 자가 거기 대장군 을혼(乙渾)이다. 을혼은 덕망 있는 관료를 독살하는 등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그러자 풍태후가 나섰다. 그녀는 악화될 대로 악화된 궁정 내 여론을 이용해 466년 을혼을 주살했다.![]()
풍태후는 자연스럽게 정치일선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467년 효문제가 태어나자 풍태후는 효문제를 양육한다는 명분으로 후궁으로 물러나 앉았고, 정권은 14세의 헌문제에게 환원됐다. 헌문제와 측근들의 압박 때문이었다. 468년 풍태후의 반대파 인물들인 자추(子推)와 이혜(李惠), 그리고 이흔(李)이 정치적으로 부상했다.
태후가 된 후 대신 을혼과 권력투쟁을 벌여야 했고, 헌문제가 나이가 들자 정적이 되었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그녀의 내면은 황폐화되었다. 사막에도 잠시 비가 내린다. 그리고 꽃이 핀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20대 중반의 과부 풍태후는 한 남자를 알게된다. 이혁(李奕)이라는 잘생긴 귀족 청년이었다.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자 풍태후는 여자가 되었다. 헌문제는 그녀를 그렇게 여자로 살게 내버려둬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연인 이혁은 470년 10월 헌문제에 의해 주살된다.
헌문제는 풍태후의 소중한 연인 이혁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방심과 경솔함도 함께 죽였다. 풍태후가 어두운 정치가로 변신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사랑한 남자 이혁의 죽음은 그녀의 영혼을 억누르고 있었다.
1년 후인 471년 8월경 북위 조정에서는 헌문제의 양위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헌문제의 퇴위는 풍태후의 압박 때문이었다. 그때 헌문제의 나이는 불과 18세였다. 풍태후의 품에서 효문제가 자라나고 있었지만, 태상황 헌문제는 너무나 젊었다. 게다가 퇴위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측근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측근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정벌과 순행활동을 했다. 헌문제의 퇴위를 그의 권력 상실로 직결시킬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당시 헌문제와 풍태후는 파당을 이루고 대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존이 불가능한 정적 사이였던 헌문제와 풍태후가 고구려 장수왕에 대해서만은 같은 목소리를 냈다. 헌문제는 풍태후의 1차 임조청정(臨朝聽政: 조정에 나와 정사를 들음)을 종료시키는 데 관여했고, 그녀의 연인을 죽였다. 이에 지지 않고 풍태후는 헌문제를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두 사람은 반목하던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따라서 장수왕에 대한 풍태후의 혼사 요구는 가식적인 친절로 보였다.
그러나 백제의 청병은 34년 전 풍홍 일족이 고구려에서 겪은 비극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고구려 장수왕에 대한 풍태후의 사적(私的) 원한을 새삼 알리는 계기가 됐고, 풍태후가 혼사를 빌미로 고구려를 압박하는 것을 심정적으로 이해하게 했다. 나아가 장수왕이 헌문제의 고구려 영내 통과 요청을 단호히 거절한 사건은 풍태후의 사적 원한을 명분으로 포장시켰다. 헌문제를 위해 풍태후가 직접 나선 고구려와의 혼사 문제는 북위 조정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고, 그것이 장기화하면서 그녀에 대한 의심도 엷어져갔다.
475년 풍태후는 다시 정준(程駿)을 필두로 하는 북위의 사절단을 고구려에 파견했다. 해를 넘기면서까지 장수왕에게 통혼을 강청(强請)한 것이다. 마침내 진노한 장수왕이 북위 사절에게 주던 술과 음식을 단절했다.
문제 해결의 단초는 고구려가 아니라 북위에서 열렸다. 태상황 헌문제가 476년 6월 23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急死)했다. 풍태후는 헌문제의 후궁에 비빈(妃嬪)의 결원을 채우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태상황 헌문제의 사생활 공간에 관여하고 있었던 풍태후는 고구려와 혼사 문제를 놓고 시간을 끌면서 후궁의 실무적 운영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그러다 마침내 476년 6월 헌문제는 풍태후에게 독살당한다.
풍태후가 북위 궁정의 암투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됐다. 고구려와 외교적 마찰이 계속되는 사이에 풍태후는 헌문제를 독살하기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풍태후의 장수왕에 대한 혼사 요구와 헌문제의 죽음은 ‘성동격서(聲東擊西)’의 형세였다. 한비자(韓非子)의 표현 그대로 ‘귀인은 겉으로는 어떤 일을 하는 척하나 실제로는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실현시킨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후 풍태후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관대했지만 북위 내부의 정적들에 대해서는 가혹했다. 476년 이후 고구려와 북위의 교역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477년 물길(勿吉) 사신이 북위 조정에 와서 백제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풍태후는
“세 나라는 화목하게 지내라!” 했다. 그뿐만 아니라 489년 각국 사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구려의 사신을 남조의 남제(南齊)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했다.
반면 헌문제가 신뢰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에 대한 벌을 받았다.
476년 11월 자추는 좌천돼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풍태후의 정인 이혁의 죄목을 헌문제에게 상주한 이흔은 477년 2월 적국인 송(宋)과 내통했다는 외반죄(外叛罪)로 주살됐다. 헌문제의 장인 이혜(李惠)도 478년 12월에 같은 죄목으로 처형됐다. 물론 이들의 가족과 수족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글ㆍ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 글 싣는 순서 |
① 다시 주목받는 백제 근초고왕
② 비운의 고구려 고국원왕
③ 광개토왕의 역사무대 등장
④ 광개토왕, 운명을 걸머진 자
⑤ 후연에 들어선 고구려 정권
⑥ 북위에 맞선 장수왕의 결단
⑦ 고구려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
⑧ 장수왕의 중국 남북조 외교전략
⑨ 북위에 사신 보낸 백제 개로왕
⑩ 장수왕과 북위 풍태후
⑪ 백제 개로왕 일가의 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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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