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환해풍파(宦海風波)라는 말이 있다. 벼슬살이는 큰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아 수많은 풍파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환해풍파를 온 몸으로 보여준 사례는 실록에 수없이 등장하지만 조선 중종 때의 정치가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벼슬살이를 보면 환해풍파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알게 된다.
그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그의 아버지 김흔과 작은아버지 김전이 장원급제자였는데 김안로도 1506년(중종1년)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요직을 두루 거쳐 1524년 이조판서에 오른다. 이때까지는 탄탄대로였다.
그런데 아들 김희가 효혜공주와 결혼해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다음부터 권력을 남용하다가 영의정 남곤 등의 공격을 받고서 유배길에 오른다. 당시의 심정을 김안로는 자신의 문집 <용천담적기>에 생생하게 적어 놓았다. 이 글은 유배지에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적은 것이다.
“한 사람이 제창하는 것이 마치 불을 부채질하는 것 같았고 거기에 천 사람의 의심이 바람같이 호응하여 칼을 갈고 물을 끓이는 자가 용맹을 떨치며 나를 급히 밀어 넣으려고 하였다.” 억울하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임금께서 밝게 살펴 주시고 당시의 여론이 특별히 용서하여, 요행히 피 묻은 이빨에서 벗어나게 되어 겨우 목숨을 잇게 되었다.” 사형을 당할 뻔하다가 유배형으로 감형됐던 것이다.
이때의 일은 김안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던 것 같다. 그 전까지는 사림들과 가까이하고 조광조 일파를 처단했던 남곤 등에 맞서기도 했던 그가 남곤을 능가하는 권간(權奸)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원래 남곤도 조광조와 가까운 사림이었다가 권간으로 돌아선 이력의 소유자다. 1527년 남곤이 죽고 그 세력이 쇠퇴하자 1531년 다시 이조판서로 복직됐고 3년 후에는 우의정을 거쳐 1535년엔 좌의정에 오른다.
과거의 드라마 <여인천하>에 악인으로 등장한 김안로는 주로 이때의 모습과 가깝다. 임금을 빼고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세자인 인종(仁宗)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까지 내쫓으려 할 정도의 안하무인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당시 조정의 큰 존경을 받던 명재상 정광필을 죽이려 시도하기도 했다.
이 무렵 퇴계 이황도 문과에 급제해 막 관리생활을 시작하던 때였다. 김안로는 이황이 동향 사람이라 하여 나름대로 챙겨 주기 위해 불렀으나 이황은 찾아가지 않았다. 권간에게 아부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 바람에 얼마 후 이황이 중앙정치의 권력투쟁에 염증을 내고 고향 근처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지방관리로 나아가려 했지만 김안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황이 정치를 두려워하고 싫어하게 된 데는 김안로의 공포정치가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안로는 중종을 얕잡아 보았다. 조광조를 총애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버린 임금이 중종이다. 김안로의 신세도 마찬가지였다. 신하로서 왕비까지 제거하려는 모습에 중종은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김안로를 전격 체포했고, 전라도 진도로 유배하였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내렸다. 공의(公義)가 사라진 세상에서의 환해풍파는 훨씬 거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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