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472년 8월, 백제 사신이 북위 조정에 도착했다. 북위에 온 최초의 백제 사신이었다. 사신은 북연(北燕ㆍ411~436)의 유민을 받아들인 후 고구려가 강성해졌고, 그 때문에 30여 년간 백제가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436년 고구려 장수왕이 북위의 이익을 침해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472년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이미 정상궤도에 올라 있었다. 462년에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낸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개선됐다. 그렇다면 백제가 이 사실을 모르고 북위에 청병했던 것일까? 속단은 이르다. <위서>(권100, 백제전)를 다시 보자.
“고구려는 남쪽으로는 유씨(劉氏ㆍ송나라)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연연( ㆍ유연)과 맹약하기도 하며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왕략(王略ㆍ북위의 땅)을 짓밟으려 하고 있습니다.”
백제는 당시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고구려가 남조(南朝) 송과 통하고 북방의 유목민 유연과 맹약해 북위를 포위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북위 내정에 대해서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사실 471년 북위 조정에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헌 문제의 퇴위가 논의되고 있었고, 결국 태자 굉(宏)이효 문제(孝文帝)로 즉위했다. 풍태후가 헌 문제의 퇴위를 사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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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조정에서 풍태후의 득세는 백제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풍태후는 438년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된 북연의 황제 풍홍의 손녀이기 때문이다. 북위에 보낸 백제 개로왕의 국서에 언급된 ‘풍씨’는 이와 관련이 있다.
“지금 연(璉ㆍ장수왕)의 죄로 나라는 어육(魚肉)이 됐고, 대신들과 호족들이 살해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 쌓였으며, 백성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멸망의 시기이며 도움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의 사마에게는 조축지연(鳥畜之戀ㆍ집에서 기르는 새나 가축처럼 옛 주인을 그리워하고 있음)이 있고, 낙랑 등 여러 군은 수구지심(首丘之心)을 품고 있습니다. 폐하의 위엄을 한번 발동하면 정벌만이 있고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위서)
백제 청병표(請兵表)에 ‘풍족의 사마(士馬)’라는 표현이 보인다.
북연 황제 풍홍은 436년 고구려 망명 때 자신의 신하, 병력, 백성도 동반했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대상은 당시 북위의 천자 헌 문제가 아니다.
북위는 북연을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고구려에 망명한 북연인들이 그리워하는 대상은 풍홍의 손녀 풍태후가 확실하다.
‘낙랑 제군(諸郡)의 수구지심’ 운운한 대목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위서>(권30), ‘문명황후 풍씨전’을 보면 그녀의 어머니는 낙랑왕씨(樂浪王氏)로 기록돼 있다. 고구려에 살고 있는 북연인들과 낙랑인들은 북위 조정에서 막후 실력자인 풍태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제 북연에서 북위로 망명한 풍태후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432년 11월 북연에 내분이 일어났다. 폐출된 태자 풍숭(馮崇)이 요서지방에서 자립했던 것이다. 풍숭은 풍홍의 원처(元妻) 왕씨가 낳은 아들이다. 후처 모용씨 소생 풍왕인이 태자에 책봉되자 풍숭은 어머니 왕씨와 동생 풍랑·풍막과 함께 요서로 도망가서 북위에 도움을 청했다.
이 풍숭이 바로 풍태후의 큰아버지가 된다. 당시 북연을 공격하고 있던 북위에 풍숭의 귀순은 좋은 기회였다. 북위는 풍숭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우대했다. 그러나 436년 북연이 멸망하자 풍숭과 그 가족들의 정치적 이용가치는 사라졌다.
풍숭과 함께 북위에 귀순한 동생 ‘풍랑’이 바로 풍태후의 아버지다. 풍태후는 442년에 장안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7세 되던 해(449년)에 집안에 불행이 밀어닥쳤다. 막내 삼촌 풍막이 북위의 숙적 유목제국 유연(柔然)으로 투항한 것이다. 아버지 풍랑은 이 일에 연좌돼 죽음을 당하고, 계모는 오빠인 풍희(馮熙)를 데리고 저강( ㆍ티베트)지역으로 도피했다. 어린 풍태후는 여자라 함께 데려가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고난은 풍태후에게 권력으로 향하는 계단이 됐다.
망국의 왕녀에서 버림받은 여아로 그리고 노비로, 그러나 455년에는 황제를 모시는 귀인으로, 다시 그 이듬해엔 황후가 됐다. 그러나 황후가 된 기쁨도 잠시, 곧 불행이 찾아왔다. 465년 남편 문성제가 죽고 20대 초반에 과부가 된 것이다.![]()
문성제의 죽음이라는 불행은 그녀에게 또 다른 상승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24세에 황실 최고의 어른 황태후 자리에 올랐다.
풍태후가 이렇게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 데는 태무제의 후궁(左昭儀)이었던 고모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궁궐로 들어온 것도 고모가 미리 손을 써 놓았기 때문이었다.
고모는 433년 6월 북위의 궁정에 들어왔다. 북연이 풍전등화의 상황에 부닥친 시기였다. 고모는 436년에 북연의 수도 화룡성이 함락되고, 친정아버지와 형제들이 고구려로 집단 망명했으며, 2년 후에 장수왕에 의해 그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북위에서 알게 됐다. 7세에 북위 궁정에 들어와 고모의 후광 아래에서 성장한 풍태후도 고구려에서의 비극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백제 개로왕의 국서를 받고 고구려에 압력을 행사한 사람은 풍태후가 아니라 헌 문제였다. 472년 헌 문제는 고구려에 사람을 파견해 실상을 조사했고, 북위 사절단을 고구려 영내를 통과하여 백제에 보내려고 했다.
북위 사신단이 고구려 영토를 통과한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목도할 것이고, 장수왕이 북위 황제에게 굴복한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질 것이었다. 장수왕의 입지는 손상될 것이 확실하며, 반대로 백제 개로왕은 북위와의 성공적인 외교를 이끌어낸 것이 된다. 장수왕은 북위 황제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헌 문제는 장수왕의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서한을 통해 엄하게 질책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서한일 뿐이었다. 실질적인 조치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백제 사신 앞에서 북위의 무력함이 드러나게 되고, 나아가 대내외적으로 헌 문제의 위신이 실추될 상황이었다.이런 상황은 백제의 청병이 사건의 발단이 되고, 헌 문제가 고구려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474년 이후 헌 문제의 정적이던 풍태후가 직접 나서 장수왕에게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글ㆍ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 글 싣는 순서 |
① 다시 주목받는 백제 근초고왕
② 비운의 고구려 고국원왕
③ 광개토왕의 역사무대 등장
④ 광개토왕, 운명을 걸머진 자
⑤ 후연에 들어선 고구려 정권
⑥ 북위에 맞선 장수왕의 결단
⑦ 고구려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
⑧ 장수왕의 중국 남북조 외교전략
⑨ 북위에 사신 보낸 백제 개로왕
⑩ 장수왕과 북위 풍태후
⑪ 백제 개로왕 일가의 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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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