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지난해 여름 마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살아난 듯 ‘엄복동 자전거’가 화제를 모았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8월 24일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근대스포츠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엄복동(1892~1951년) 선수의 자전거를 문화재(등록문화재 제466호)로 등재한 것이다.
‘엄복동 자전거’는 ‘최초의 스포츠영웅’이랄 수 있는 엄복동에게 1920년 영국 러지(Rudge-Whirtworth)사가 기증한 것으로, 엄복동이 은퇴 후 후배선수에게 물려주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엄복동은 1910년 전조선자전거대회에 출전해 우승한 이후 1929년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대회에 참가하며 월등한 기량으로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했다. 그의 우승은 국권 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민족적 일체감과 자긍심을 고취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엄복동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였던 안창남(1900~1930년)과 더불어 “떴다 봐라 안창남, 굽어보면 엄복동”이라는 노래로도 칭송됐다. 하지만 은퇴 뒤 그의 기록은 초라하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그는 광복 후 경기도 동두천과 연천 부근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다 1952년 6·25 전쟁 당시 비행기 폭격으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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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민족영웅으로 불리던 이의 은퇴 후 인생행로가 왜 이리 초라했을까. 근대스포츠 1백년을 돌아보면 비운의 스포츠영웅은 엄복동 한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4월 5일 서울올림픽파크텔에서 개최된 ‘한국스포츠 100년, 스포츠영웅 왜 중요한가’라는 주제의 세미나는 이 같은 현실에 대한 자성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영웅의 의의와 중요성, 재조명 방안 등에 대해 논의와 토론이 이뤄졌다.
한국체육학회(회장 이종영), 한국체육정책학회(회장 안양옥)가 공동 주최한 이날 세미나에는 체육인과 관련 학회와 단체, 언론인 등 3백여 명이 참석해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기조발제자로 나선 구창모 한서대 스포츠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스포츠 100년, 스포츠영웅은 왜 중요한가’라는 주제로 “한국선수들은 최고 수준의 무대에서 꿈을 이룬 국민적 영웅이 되어 왔다”며 “스포츠영웅이 한 사회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분야는 바로 지금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한 사회통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스포츠영웅은 어떤 사람들인가. 구 교수는 “스포츠영웅이란 일시적인 성과가 아니라 일생 동안 이룩한 스포츠 업적을 바탕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라며 “높은 도덕성, 유일성, 상징성, 허구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포츠영웅이 자칫 물질만능주의 조장, 엘리트 제일주의 촉진, 문화적 식민주의 초래 등 역기능도 가져올 수 있으나 사람들은 사회적·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역할모델이 되어 줄 영웅을 그리워한다”며 사회통합 이외에도 심리적 요인에서 스포츠영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천호준 우석대 태권도학과 교수는 ‘스포츠영웅의 의미와 현실’이란 주제의 발제에서 “과거 어려웠던 시절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주었던 손기정, 박세리, 박찬호, 축구의 태극전사 같은 스포츠영웅들은 국가적 위기를 거치는 동안 사회통합과 민족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스포츠영웅의 역할을 크게 임춘해와 같은 ‘역할모델’과 손기정, 박세리, 박찬호 등과 같은 ‘사회통합과 국위선양 모델’로 구분한 천 교수는 “스포츠영웅들에 대해 오픈카 퍼레이드까지 하며 환영식을 해 주기도 했지만 그들 대부분 국민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이는 무형의 국가적 자산의 손실이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2008년 KBS TV의 시사다큐멘터리 <쌈>의 ‘슬픈 금메달’편을 제작했던 KBS 스포츠제작부의 정재용 기자는 토론자로 참석해 스포츠영웅들의 그늘진 삶을 구체적으로 조명했다.
정 기자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유도 금메달을 따내고 은퇴한 뒤 굴곡진 삶을 살아온 김재엽 선수(현 동서울대 교수)를 예로 들며 “한국 스포츠는 금메달을 딸 때까지의 과정만 시스템화돼 있고 그 이후 시스템은 갖춰지지 않았다”며 “영웅을 만드는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전환과정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진정한 스포츠영웅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의 스포츠영웅들이 경기 후 방치되는 콜로세움의 검투사 같아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스포츠영웅의 의미와 현실: 해외사례를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발제를 한 권순용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스포츠영웅에 대한 해외 예우 사례로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Halls of Fame and Museums) 현황을 전했다.
권 교수는 “전 세계 46개국에서 5백80개 이상의 스포츠박물관 및 명예의 전당이 운영 중이고, 이 중 약 4백여 개가 미국과 캐나다에 있다”며 “세계 10대 스포츠강국으로 자칭하는 우리나라에는 내세울 만한 스포츠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스포츠영웅 기념사업은 스포츠영웅 개인에 대한 예우나 보상에 머무르기보다 스포츠를 하나의 문화적 자산으로 향유할 수 있는 스포츠인프라 구축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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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세미나의 마지막 발제자인 권민혁 단국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우리나라 스포츠영웅의 재조명을 위한 과제’란 주제로 “현대사회에서 스포츠영웅은 세계 공통의 기준이 적용되고 경쟁대상이 분명하며 평가하기가 쉽다는 특성 때문에 모든 이의 사랑을 받고 자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은 방안들을 제시했다.
즉 ▲스포츠영웅의 조건과 자질, 범위 등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 ▲스포츠영웅의 자질교육 선행 ▲여성 스포츠영웅의 발굴 ▲국가적(national) 스포츠영웅과 함께 지역적(local) 스포츠영웅 확산 ▲‘1등 ’ 이외의 스포츠영웅 만들기 등이다.
1980년대 배구스타였던 장윤창 경기대 체육학과 교수는 토론자로 나서 “우리 현실에선 스포츠영웅이란 말 자체가 적절치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며 “국가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스포츠영웅의 범위 규정, 연금제도 등 관련 제도를 정비한 다음 스포츠영웅을 논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레슬링 경기인 출신인 김학열 경기단체연합회 회장도 토론자로 나와 “많은 스포츠인들이 현장에서는 영웅이고 스타이지만 사회로 돌아갈 때는 절름발이 내지 반쪽 영웅이 된다. 이들이 은퇴 후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도록 교육과 관리 지원이 요구된다”며 ▲스포츠영웅 거리 조성 ▲전담조직의 지속적 관리 ▲스포츠지원센터 건립 등을 제안했다.
박선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이날 “영웅을 가진 사회와 영웅을 가지지 못한 사회는 다르다”며 “영웅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말로 축사를 시작했다.![]()
“박치기왕 김일, 축구선수 차범근,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신화의 박종환 감독 등 스포츠영웅들은 어려운 시절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준 후대의 표상”이라고 말한 박 차관은 외신기자들이 강원도 평창에 대해 “왜 세번째 도전이냐” 물었을 때 했던 답변으로 ‘왜 지금
스포츠영웅인가’를 설명했다.
“대한민국은 올림픽을 계기로 발전한 나라라고 답했습니다. 서울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을 내보였고, 성공 개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올림픽 정신에 진 빚을 갚으려고 한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성공하라고, 대한민국이 개최하는 올림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입니다.”
박 차관은 ‘영웅들을 만들어 보자’는 말로 축사를 마무리했다.
“미국이 세계 최강이 된 비결은 끊임없이 영웅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영웅이 모델이 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대열에 합류하면서 미국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도 영웅을 만들어 봅시다.”
잊혔던 엄복동의 이름은 ‘엄복동 자전거’의 문화재 선정을 계기로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요즘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는 암을 극복하고 ‘투르 드 프랑스’ 7연패를 한 미국의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이 살아있는 인간승리의 신화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낡은 중고 자전거로 민족의 긍지를 드높인 엄복동이 있었음을, 그리하여 많은 엄복동의 후예들이 고난 극복과 부흥의 역사 속에서 희망과 위로의 영웅들이 되어 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박경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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