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조선시대 공부를 하면서 요즘 새롭게 생긴 버릇 중에 하나가 사람 이름을 유심히 뜯어보는 재미다. 오늘 소개하는 이거이(李居易·1348~1412)의 경우도 흥미롭다. 居易(거이)! 아마도 그 이름을 지어 주면서 편안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십중팔구 정반대로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거이의 삶도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고려 말 이거이의 집안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도 문하부 참찬사를 역임했으니 전도유망한 인물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두 아들 중 한 명인 이저(李佇)는 이성계의 장녀 경신공주와 결혼했고 이어 또 한 명 이백강(李伯剛)은 이방원의 장녀 정순공주와 결혼했다. 이는 고려 때의 결혼풍습인데 아버지 이성계와도 사돈이었고 아들 이방원과도 사돈이었던 셈이다.
1차 왕자의 난은 이거이에게는 중대한 갈림길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거이로서는 아버지 사돈과 아들 사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상황판단에 뛰어났던 이거이는 아들 사돈 이방원의 길을 선택한다.
다행히 이성계의 사위 이저도 장인이 아닌, 아버지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태종 이방원의 노선에 합류해 1, 2차 왕자의 난 이후 공신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당연히 이백강은 장인의 길이자 아버지의 길인 태종 이방원의 노선에 섰다. 특히 2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을 측근에서 모시며 큰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다소 거만했던 아버지와 달리 “청렴하고 결백하며 온화하고 근면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그 덕분에 당시로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이거이는 사돈 이성계의 후광으로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사 등을 지내다가 1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정사공신으로 책봉되고 다시 좌명공신으로 책봉된 이후 본격적으로 출세의 길에 들어선다. 게다가 최고의 실력자 이방원과도 사돈관계였으니 영의정 부러울 것 없는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거이는 오판했다. 자신의 권력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방원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지방행정제도가 안정돼 있지 않아 왕실의 형제들이 각 도를 나눠서 맡았다. 이는 마치 중국에서 황제가 아들들에게 나라를 나눠 주고서 공(公)이나 후(侯)로 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정종 1년(1399년) 11월 1일 정안공 이방원은 강원도와 동북면(함경도)을, 익안공 이방의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회안공 이방간은 풍해도(황해도)를, 그리고 상당후 이저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맡았다.
해당 도의 군권을 맡은 것은 사실상 그 도에 대한 전권을 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들 이저가 경상도와 전라도를 맡고 있는 상황에서 이거이는 중앙의 군사지도부에도 참여했다. 이러니 얼핏보면 이방원의 권력이나 이거이 부자의 권력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6개월쯤 후인 이듬해 4월 이방원은 권근을 앞세워 전격적인 사병혁파를 단행한다. 한순간에 이거이 부자의 권력기반도 날아갔다. 게다가 이거이 부자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가 발각됐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이거이 부자는 한때의 영광을 모두 놓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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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