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담낭암 투병 중 지난 1월 22일 별세한 소설가 박완서(80)씨는 한국현대사를 관통한 비극의 역사와 실향(失鄕)의 한(恨), 학업중단, 가족의 죽음이라는 개인의 체험을 내면화해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서사로 승화시킨 한국현대문학의 거목이었다.
“6·25전쟁 통에 오빠와 삼촌을 잃고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惡人)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습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박완서의 문학은 기본적으로 증언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욕구는 박완서에게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을 갖게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를 문학에 온전히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되기도 했다. 박씨는 “20년이 지난 뒤에야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소설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박완서는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제대로 다녀 보지도 못하고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가난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매던 그는 커다란 아픔을 연이어 겪었다.
2010년 여름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내며 그는 당시의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꽃다운 20세에 6·25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다. 노구(老軀)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작가 박완서를 기억하는 사람은 모두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소녀처럼 웃는 박씨의 웃음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를 조금 더 아는 사람들은 그 웃음의 이면에 가라앉은 큰 상처를 본다. 전쟁 중에 오빠를 잃고 병마와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잇달아 떠나보내며 무너질 뻔했던 한 여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썩어 가는 환부를 소설이라는 수술칼로 도려낸 뒤 지은 용감한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자애로운 미소와 달리 박씨의 소설에 나타나는 냉철하고 치밀하며 때로는 신랄하기까지 한 어조는 삶이 부과하는 고통의 기세에 결코 눌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완서는 여성의 몸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을 쉼 없이 되새김질하면서도 사랑과 용서·화해의 높은 세계를 노래하며 한국 문학의 찬란한 봉우리로 우뚝 섰다.
6·25전쟁 체험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다룬 <엄마의 말뚝> 연작과 <그 남자의 집>은 남성 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여성의 체험이라는 새로운 프리즘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큰 문학적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이 소설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고발했을 뿐 아니라 힘을 앞세운 폭력에 깃든 인간의 비열한 속성을 거침없이 들춰 냈다.
박완서는 인간의 내면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데 능했으며, 이를 명쾌하고 거침없는 서사로 표현한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휘청거리는 오후>에서 그녀는 19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중산층의 속물화된 일상과 허위의식, 세속적 탐욕을 신랄한 문체로 꼬집었다.
동시대의 삶을 기록하는 그녀의 세밀한 관찰은 한국 현대사 풍속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박씨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여성주의적 관점의 소설도 다수 발표했다.
박완서는 문학적 성취와 독자의 사랑을 동시에 거머쥔 행복한 작가였다. 1992년 출간한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930년대 고향 개풍에서의 어린 시절과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20대까지 경험을 토대로 전쟁을 기억한 작품으로 1백만 부 넘게 팔렸다. 그녀가 77세의 고령에 발표한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도 30만 부나 나가며 그녀가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국민작가임을 증명했다.
노년의 박완서는 <부숭이의 땅힘>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등 동화집을 쓰며 세상에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살아 가는 기쁨을 어린이들에게 전하려 애썼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나눈 아름다운 교유를 통해서도 그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다. 2009년 김 추기경의 선종을 접한 박완서씨는 “그분은 정의를 위해 박해받고 쫓기는 이들을 말없이 그분의 날개로 덮고 품으셨을 뿐, 결코 선동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으셨다.![]()
만약 그분까지 투쟁적이었다면 그분의 그늘, 그분의 날개 밑이 그렇게 편했을 리가 없다”고 했다. 김 추기경의 너그러운 인품과 넉넉한 포용의 경지는 곧 그가 삶에서 추구했던 덕목이었다.
박완서는 1970년 <나목>으로 등단한 이후 40년간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등 10권의 소설집을 엮었고, 15편의 장편을 발표하며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대한민국문학상 등과 보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19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고, 2004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됐으며, 2006년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1월 24일에는 정부가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고인의 유해는 1월 25일 남편과 아들이 먼저 잠들어 있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에세이를 묶은 산문집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에 기고한 글에서 그녀는 남편과 아들을 다시 만날 날에 대한 심경을 토로했다.
고인은 몰일(沒日)만 빈칸으로 남겨 놓고 자신의 이름까지 미리 새긴 묘비를 세워 두었다고 밝히고, “갈 때마다 가슴이 에이는 듯 아프던 데가 이상하게도 정답게 느껴지면서 깊은 위안을 받았다”는 심경을 담담히 고백했다.
필자는 문학담당 기자로 이런저런 자리에서 그분을 만나면서 인간적인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의 생애가 부과한 아픔과 고통을 속으로 갈무리하고 오직 문학의 높은 경지를 향해 쉼 없이 정진한 위대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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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