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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국보 제68호)’은 아름다운 선과 맑고 푸른색이 빼어나다. 전면에 마흔여섯 개의 동심원을 배치한 점도 눈길을 끈다. 또 원형을 흑백으로 이중 상감 처리한 우수한 문양이 병 전체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미인의 어깨가 연상되는 유려한 견부(肩部)가 화려하다.

1935년경 서울 대화정(지금의 필동)에 살던 일본 골동상인 마에다 사이이치로는 대구에서 치과병원을 경영하던 신창재로부터 천학매병을 입수했다. 신창재는 자기의 모든 소장품을 돈 한 푼도 받지 않고 해방 후 고려대학교에 기증한 인물이다. 일본인들이 이 땅의 고미술품을 모조리 도륙하는 것을 본 그는 우리의 고미술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훗날 자료로 남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명품 한 점을 팔아 다양한 소장품을 갖추고 싶어 마에다에게 천학매병을 넘겼다.

천학매병을 입수한 마에다는 이 물건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구입하려는 사람에게 무려 2만원의 가격을 부르는 도박을 했다. 당시 고려청자 값으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거금이었다. 서울 장안에서 쓸 만한 기와집이 2천원 정도였으니, 기와집 열 채 값이자 시골에선 수백 석지기 땅값이었다. 그럼에도 천학매병을 본 서른 살의 젊은 전형필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흔쾌히 가격을 치르고 구입했다. 충청도에 있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아 잔금을 치르면서까지.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그 후 일본인 골동상 무라카미가 천학매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욕심을 내었다. 당시 도쿄와 오사카에서 서울로 진출한 일본인 골동상은 여럿이 있었다. 워낙 한국과 일본에서 골동품 가격 차이가 극심해 좋은 물건만 잡으면 금방 돈벼락을 맞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때문에 무라카미는 한걸음에 서울로 달려와 전형필을 만났다. 무라카미는 “얼마를 부르든 간에 돈을 내겠으니, 물건만 넘겨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전형필이 무라카미에게 말했다. “무라카미 상이 이 천학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저한테 가져다주시고 이 매병은 원금에 가져가시지요. 저도 남만큼 대가를 치를 용의가 있습니다.”

그 순간 그토록 전형필의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말이 또 있었을까. 천학매병은 총독부박물관은 물론 내로라하는 거물급도 엄청난 가격 때문에 군침만 흘리던 매병이었다. 그런데 이 매병을 그들이 가장 깔보는 조선인이 서슴없이 사가 되팔지 않으니, 대수장가로 정평 난 무라카미로선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골동계에서 한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인식이 일순간 달라졌다. 전형필은 해방 후 보성학원의 어려운 재정 문제로 몸과 마음이 상하면서도 끝끝내 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팔지 않았다. 이 매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8호로 지정되고, 지금까지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청자운학문매병을 현재 시중 값으로 평가하면 얼마나 될까. 1935년 당시 2만 원이라면 명품 청화백자필통 40배 값에 해당된다. 1990년대에 들어 필통 명품이 약 5억원에서 10억원까지 매매됨 점을 감안할 때 매병은 약 250억원 정도 될 것이다. 이 같은 금액은 세계적 미술품이나 서울 강남의 요지 땅값 상승률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문화재를 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에서나 역사성에서 오류를 범할 위험이 많다. 그렇다고 경제성을 빼버린다면 매력 없는 역사 유물로 전락해 볼품이 없어진다. 이러한 역사성과 경제성, 그리고 문화재가 가진 희귀성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전 재산을 걸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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