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이마에 내려와 닿는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3월의 어느날 오후 판대역 앞에 섰다. 이제 막 봄이 시작된 개울을 스치는 명랑한 물소리와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쉼 없이 재잘대는 새소리와 신나게 뛰노는 동네 꼬맹이들의 낭창한 웃음소리들이 동시에 작고 낡은 역 주변을 부유하고 있었다.

판대역이라. 낯선 이름 아닌가. 사람들이 한동안 관심 가졌던 간이역들은 청량리를 출발해 춘천으로 향하는 경춘선의 간이역들이었다.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이던 화랑대역이나 경강역, 백양리역이나 김유정역 등 말이다. 중앙선인 판대역은 양평과 원주의 경계 지점에 있다. 서울에서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는 이곳 판대역을 지나 강릉으로 또는 안동으로 향했다.




1965년 처음 승객을 태우고 내렸던 판대역은 지난 2008년 승무원이 없는 간이역으로 변경됐고, 지난해 12월 20일 저녁 8시 8분, 안동으로 가는 무궁화 1609편 열차를 떠나보낸 뒤 문을 닫았다. 개울 건너편 반듯하게 지은 신역사로 모든 업무가 옮겨가며 판대역은 시간의 뒤편에 남게 됐다.

네모난 건물 입구에 붙은 오래돼 반질해진 손잡이를 밀고 대합실 안으로 들어섰다. 격자무늬의 말간 유리창 너머로 해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터라 긴 시간 사람의 온기가 없었음에도 공기는 그리 차갑지 않다. 서너 평 되는 손바닥만한 대합실에는 연두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의자가 있었다. 그게 다였다.

동그란 시계가 붙었던 자리, 네모난 액자가 있던 자리, 열차 시간표와 요금이 적힌 안내판이 걸렸던 곳은 이제 거뭇한 흔적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기차에 타고 내리는 승객들로 분주했을 오래전 어느 때의 시간을 더듬고 있던 순간, 멀리서 기차가 내뱉는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창 너머로 개울 건너편의 판대역 신역사가 눈에 들어왔고 곧게 뻗은 새로운 기찻길을 따라 몸집 긴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양평을 지나는 중앙선의 굽었던 철로가 지금은 대부분 곧게 펴졌다. 몇몇 역은 아예 사라져 크고 번듯한 현대식 건물로 재탄생했고, 폐역사가 된 뒤 이따금 옛 기억을 찾는 여행자의 방문을 받는 역들도 있다. 간혹 아름다운 건축물로 인정받아 카메라 든 여행자를 맞고 틈틈이 영화나 TV 드라마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석불역과 매곡역 사이의 구둔역도 그중 하나이다.

판대역에서 서쪽으로 길을 달려 양동역과 매곡역을 지나 구둔역으로 가는 길. 작은 시골마을 지붕 낮은 농가들 사이로 난 외길을 따라 올라가면 구둔역이 나온다. 뾰족한 세모지붕을 가진 아담한 옛날식 건축물은 전형적인 시골마을 간이역이다.

구둔역은 수리봉(해발 4백미터)과 고래산(5백42미터) 자락에 둘러싸인 구둔마을의 이름에서 따 왔다. 아홉 구(九), 진칠 둔(屯)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이 지역의 높은 산에 아홉 개의 진을 설치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구둔마을 한가운데 들어앉은 이 역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용문산 일대에서 약초와 취나물, 두릅 등을 채취해 경동시장으로 팔러 나가는 노인들과 통학생들이 새벽부터 이곳을 찾았다. 게다가 ‘양평장’이 서는 날이면 장을 보러가는 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단다.

하지만 구둔역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을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고향을 떠나고 자가용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이용객이 줄자 구둔역은 1996년 결국 기차표를 팔지 않는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역사는 1940년 중앙선 양평~원주 구간을 개통하며 지어졌고 지난 2006년에는 보존가치가 인정돼 근대문화유산(제296호)으로 지정됐다. 대합실 출입구의 박공지붕 하며 지붕 아래 덧댄 차양 등은 건물의 입체감과 아름다움을 더한다. 게다가 하루에 8번 이곳에 기차가 선단다. 대합실에 켜 있는 석유난로의 따뜻한 온기에 안도감이 든다. 기차를 기다리는 두어 명의 승객이 반갑다.




여느 간이역과 달리 지금도 두 명의 역무원이 하루 3교대를 하며 역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오는 가을쯤 덕소와 원주 사이의 중앙선 복선전철화공사가 완료되면 구둔역은 판대역이 그러했듯이 기차를 새 철로와 새 역사에 내어줄 것이다. 그나마 언제라도 찾아오면 이 어여쁜 역사가 여행자를 맞아줄 것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석불역 가는 길은 구둔역보다 더 의뭉스럽다. 논두렁 사이로 난 농로를 따라 들어가야 역으로 갈 수 있는 데다가 역사 주변으로 경계선 따위가 없어 자동차를 역사 안쪽으로 대놓을 수밖에 없다. 보통 기차역 광장은 역사 앞에 있는데, 이 역은 역사 안에 있는 셈이다.

게다가 역사 중앙의 출입구 앞은 공간이 없는 낭떠러지다. 그러니까 대합실에서 문을 열고 역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아마도, 지금까지 본 기차역 중 가장 이상하고 희한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1967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던 석불역은 2008년 무배치 간이역으로 변경됐고 지난해 10월 이후 여객 취급이 중지됐다. 보통의 폐역사가 그러하듯 이제 곧 철거의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판대역보다 크기가 작은 대합실에는 서너 명쯤 앉을 수 있는 회색빛 나무의자가 있었고 벽에는 군데군데 글자가 떨어져 나간 운임표가 붙어 있었다. 더없이 쓸쓸하고도 묘한 분위기의 석불역을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지팡이를 짚은 노인 한 분과 만났다. “이젠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노인은 그때 그 기차의 속도 만큼이나 느긋하게 철로를 건넌다. 그의 발길을 눈으로 좇으니 철로 옆 조그마한 민가 한 채가 보인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노래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한낮 잠시라도 볕이 따뜻하다면 기차 레일 위를 달려보는 것은 어떨까. 용문면사무소 인근 용문역과 원덕역 사이 폐철로를 이용한 3.2킬로미터 구간이 레일바이크 체험장으로 꾸며졌다. 철길 건널목과 터널, 시골마을과 작은 개울을 지나는 왕복 6.4킬로미터의 거리를 다녀오는 데 1시간 정도 소요되며 아침 9시부터 1시간 30분 간격으로 1일 7회 운영된다. 주말이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다.

자전거 마니아라면 중앙선 자전거길 라이딩을 즐겨 봐도 좋다.

지난해 10월 양평을 지나는 중앙선 양정역에서 아신역까지 남한강 줄기 따라 뻗어 있는 18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경치 좋은 폐철로 구간이 자전거 도로로 변신해 개통됐다. 낡은 철교가 나무 데크 깔린 멋진 자전거길로 변했고 어두컴컴한 터널도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단장했다. 몇 개의 운치 있는 간이역들을 둘러보면서 자전거 페달을 밟아보자. 바람결에 어디선가 봄향기라도 섞여 온다면 더없이 멋지지 않겠는가.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