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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SET_IMAGE]2,original,center[/SET_IMAGE]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잡음이 심하게 섞인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울고 웃던 1960년대. 가난했던 그 시절 ‘라디오’는 사람들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 국민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스포츠 경기 중계는 온 국민을 라디오 앞으로 불러 모았다. “우리의 믿음직스러운 대한건아를 보라”며 외치던 이광재·임택근 아나운서의 현지 스포츠 중계방송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전 국민이 열광하던 시절이었다. [B]수십 리 길 걸어 김일 경기 시청[/B] 1970년대 초 당시 국민 영웅 김일 선수의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은 으레 TV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 중계를 보고 서로 얼싸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흑백TV조차 흔치 않던 그 당시 TV를 볼 수 있었던 만화방이나 구멍가게에는 프로레슬링 TV방송 시간표가 나붙었다. 시골마을에서는 수십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TV가 있는 집으로 몰려가 레슬링 중계방송을 시청하기도 했다. 한 달에 1회 방송됐던 프로레슬링 중계방송은 서민에겐 삶의 낙이자 ‘희망’이었다. TV 스포츠 중계는 1970년대 후반 들어 절정에 달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오냐, 대한 국민 만세다.” 1974년 이역만리 남아공에서 홍수환 선수가 WBA 밴텀급 타이틀을 따낸 뒤 어머니와 나눈 두 마디는 전 국민을 감동시키며 유행어가 돼 TV 중계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SET_IMAGE]4,original,center[/SET_IMAGE] [B]컬러TV 보급, 방송사 중계도 각양각색[/B] 1980년대 컬러TV 보급은 스포츠 중계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현장감 위주의 ‘라디오’와 달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계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이는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에서 잘 나타났다. TV중계는 이제 더 이상 화려한 언변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경기 진행에 도움을 주는 전문 지식이 필요했다. 방송사마다 스포츠 전문 아나운서가 생겨난 것도 1980년대 후반 무렵이다. 스포츠 중계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중계를 계기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B]스포츠 전문채널 PDP, 휴대용 DMB까지[/B] 1990년대 들어 기술의 발전은 집에만 머물렀던 TV의 영역을 바깥으로까지 넓혔다. 고속버스에서 스포츠 중계를 볼 수 있도록 TV가 설치되고 가정에서는 보다 큰 TV가 거실을 차지했다. TV의 대량 보급은 양질의 콘텐츠를 요구하게 됐고 방송사의 스포츠 중계는 큰 변화를 맞았다. 야구의 박찬호·김병헌 선수가 그 선두에 섰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우리 선수들이 진출하면서 스포츠팬 층이 두터워졌고 이는 외국의 수준 높은 경기의 방송 횟수를 늘리는 데 일조하며 스포츠 케이블TV 개국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는 본격적인 PDP, 휴대용 DMB(디지털미디어방송) 등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스포츠 시청에도 일대 변화를 맞았다. [RIGHT]최재영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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