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중략)… 나는 장독(杖毒)으로 쑤시는 허리를 시골 아전들의 행랑방 구들에 지져가며 남쪽으로 내려와 한 달 만에 순천 권율(權慄) 도원수부에 당도했다. 내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시작이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의 일부다. 소설 속의 ‘나’는 물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충무공은 정유년(1597년) 2월 26일(이하 모두 음력) 한산도에서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다. 군공(軍功)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는 죄목이었다. 그가 맡고 있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곧바로 원균에게 넘겨졌다.
한양으로 압송된 충무공은 의금부에 투옥된 뒤 한 달 가까이 가혹한 문초(問招)를 겪었다. 하지만 조정은 그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고, 결국 유성룡과 정탁의 도움으로 무고함이 밝혀졌다.
4월 1일에 사면된 충무공은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의 백의종군을 명받고 남행(南行)길에 올랐다. 도중에 고향인 충남 아산에서 모친상을 치르기도 했던 충무공은 공주→여산→전주→임실→남원→곡성을 거쳐 5월 26일에 지금의 경남 하동군 악양 땅에 도착했다.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는 이순신 장군이 사면된 때부터 그해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의 재수임 교지를 받을 때까지 넉 달 동안의 여정(旅程)이다.
현재 경상남도는 백의종군로 가운데 하동~사천~진주~산청~합천 등을 경유하는 1백61.5킬로미터 구간을 문화와 역사가 있는 테마관광자원으로 개발 중이다. 그리고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과 하동군 고전면 주성마을 사이의 42킬로미터에 이르는 백의종군로 구간은 지난 5월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생태 탐방로 중 하나로 선정됐다.
하지만 아직은 전체 코스의 정비가 끝나지 않았다. 더욱이 찻길과 겹치는 구간이 많아서 18킬로미터의 전체 구간을 도보로만 탐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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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길리마을~금만마을 간의 4.8킬로미터, 하동군 옥종면 문암리의 문암정~옥종면 소재지 간의 강둑길 5킬로미터,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장암교~중단이재~주성마을 간의 4.4킬로미터 구간이 찻길을 피해 비교적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그리고 충무공의 백의종군 행로와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려면 하동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산청 남사마을에서 끝내는 것이 좋다.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주성마을에는 하동읍성(사적 제453호)이 있다. 백의종군로에 오른 충무공은 하동 악양과 두치에서 하룻밤씩 묵은 뒤 5월 28일 하동읍성에 당도했다.
임진왜란 당시 하동현청은 오늘날의 고전면 고하리에 위치해 있었다. 고하리는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임진왜란 이후인 1703년까지 하동의 행정 중심지였다. 1417년(조선 태종 17년)에 처음 축조된 하동읍성은 외성(토성)과 내성(석성)의 이중구조를 갖췄다.
하지만 하동현청이 지금의 하동 읍내로 옮겨진 이후 여태까지 방치됐다가 최근 들어 성벽 복원공사와 탐방로 개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양경산성’ ‘고현성’으로도 불리는 하동읍성의 맨 꼭대기인 양경산 정상(해발 1백49미터)에 올라서면 하동읍성 일대의 산자락과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이틀 동안 머무르며 몸을 추스른 뒤 다시 길을 나섰다.
하동읍성이 있는 고하리 주성마을에서 소여곡소류지(저수지)를 거치고 중간이재를 넘어 장암교까지는 4.4킬로미터의 산길 구간이 개설돼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정표도 거의 없는 데다 인적조차 뜸해 초행자가 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을 감안할 때 하동읍성에서 다음 목적지인 옛 청수역(지금의 옥종면 정수마을)까지 25킬로미터에 이르는 구간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좋다.
6월 1일 이른 아침에 하동현청을 떠난 충무공은 빗길을 걸어 청수역에 도착해 말을 쉬게 했다. 청수역이 자리했던 정수마을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옥종면 청룡리에는 충무공이 유숙했던 이희만과 이홍훈의 집이 남아 있다.
정유년 7월 18일 합천의 도원수 진에서 원균의 패전 소식을 들은 충무공은 권율 장군의 명을 받아 전황을 살피러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7월 20일 옥종면 청룡리에 도착한 충무공은 이희만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희만의 조카인 이홍훈의 집에서는 나흘간 머물며 왜적을 물리칠 궁리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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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종면 소재지인 청룡리부터는 위험한 찻길 대신에 호젓한 강둑길을 걸을 수 있다. 청룡리에서 문암리 덕천강변의 문암정까지 5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은 시원한 강둑을 따라 이어진다.
하지만 겨울에는 칼바람을 감내해야 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강정(江亭)으로도 불리는 문암정은 덕천강변의 우뚝한 절벽 위에 자리 잡았다. 상쾌한 강바람은 물론이고, 강 건너편의 진주시 수곡면 원계마을까지 훤히 조망을 누릴 수 있는 정자다.
문암정에서 약 1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원계마을에는 충무공이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머물렀던 손경례의 집이 있다. 여기서 충무공은 전황을 살피기 위해 함께 길을 나선 군사들을 마을의 들녘에서 훈련시키기도 했다.
그는 <난중일기>에서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고하고 말을 달렸는데 (권율) 원수가 보낸 군대는 모두 말도 없고 활에 화살도 없으니 소용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때 군사를 훈련했던 ‘진배미’는 오늘날 대단위 비닐하우스단지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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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례의 집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유적지 가운데 가장 기억될 만한 역사 현장이다.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한다는 선조 임금의 교지를 받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7월 15, 16일의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고 원균이 전사하자 선조는 크게 놀랐다.
그래서 충무공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는 교서를 급히 7월 22일에 내렸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8월 3일 손경례의 집에서 재수임 교서를 받은 충무공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린 뒤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 이로써 충무공의 백의종군 행로도 끝나게 됐다.
오늘날 손경례의 집에는 1965년에 세웠다는 ‘삼도수군통제사재수임기념비’만 덩그러니 남아 주인 떠난 빈집을 지키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생전의 충무공을 지켜봤을 수령 6백 년의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다.
원계마을에서 드넓은 강변 들녘과 나직한 산자락을 좌우에 두고 북쪽으로 4.5킬로미터쯤 달리면 금만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여기서 감나무골, 송골재, 길리마을, 길리재, 남사저(저수지), 천삼포 등을 거쳐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로 넘어가는 4.8킬로미터의 산길이 시작된다.
문화생태 탐방로로 선정된 백의종군로 구간 가운데 가장 마음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시멘트로 포장된 마을 진입로와 푹신한 흙바닥의 오솔길과 구불구불한 논두렁길이 뒤섞인 이 구간에서는 다양한 정취와 풍경을 맛볼 수 있다.
흔히 ‘남사예담촌’으로 불리는 남사마을은 고풍스런 한옥 마을이다.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된 돌담이 3.2킬로미터나 이어지고 이씨고가, 최씨고가, 사양정사, 분양종택, 이사재 등의 고래등 같은 고택들이 즐비하다.
그중 이사재는 백의종군로에 오른 충무공이 하룻밤을 묵었던 박호원 집의 재실이다. 정유년 6월 1일 아침 일찍 하동읍성을 출발한 충무공은 청수역에서 잠시 말을 쉬게 한 뒤 다시 길을 재촉해 해질 무렵 남사마을에 도착했다. 충무공은 박호원의 농막에서 불편하게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 일찍 길을 나서 30여 리쯤 떨어진 단계천변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었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를 자분자분 걷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4백여 년 전의 아득한 세월을 거슬러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 길에서 마주치는 충무공의 자취는 가늠하기 힘들 만큼 희미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위국충정(爲國忠情)이 가득했던 충무공의 숨결과 정신은 어디서나 또렷하게 느껴진다.
글과 사진·양영훈(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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