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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091019호

조선의 공직자들 2 - 조말생은 왜 정승이 되지 못했나?




조선 제1호 장원급제자 송개신(宋介臣)이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최초의 장원급제 출신 정승이 될 수 있는 기회는 제2호 장원급제자 김익정(金益精)에게 돌아갔다.
 

태조 5년(1396년)에 장원급제한 김익정은 한성부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낸 아버지 김휴(金休)의 배경까지 거들어 장래가 촉망 받던 관리였다. 그런데 관직생활을 40년 가까이 했음에도 김익정은 1436년(세종 18년) 세상을 떠날 때 형조참판에 불과했다.
 

젊어서는 요직을 두루 거치고 근검과 효행이 뛰어나다는 평까지 있었음에도 오늘날 차관급인 참판에 머물렀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너무 강직하거나 아니면 고지식한 경우다.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요구되는 ‘정치력’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지나친 정치력 또한 화를 부르는 게 벼슬살이의 어려움이었다. 제3호 장원급제자 전가식(田可植)이 전형적인 경우다. 정종 1년(1399년)에 장원급제한 전가식은 임금에게 간(諫)하는 사간원의 요직을 맡아 일찍부터 중앙정치에 관여했다. 그러나 민무구 형제들과 가까운 것이 화근이었다. 태종은 처남인 민씨 4형제를 제거하면서 그의 세력을 함께 뿌리 뽑았다. 전가식도 이때 서인(庶人)으로 전락하고 결국 세종 4년 역적(逆賊)으로 몰려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제4호 장원급제자 조말생(趙末生·1370~1447)은 태종이 처음부터 뽑은 문과 급제자인 데다 태종의 무한 총애를 받으며 요직으로만 관직생활을 했고 77세까지 살았다는 점에서 정승이 되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미스터리다.
 

태종 재위 당시 조말생의 고속승진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에 앞서 먼저 조말생의 형제들을 살펴봐야 한다. 조말생의 형 조계생(趙啓生·?~1438)은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해 태종 때까지만 해도 한직을 돌다가 세종의 총애를 받아 병조, 이조, 공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지만 결국 정승에 이르지는 못했다. 게다가 아들 조극중이 이조판서에까지 오르지만 계유정난 때 김종서와 황보인 쪽에 가담했다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반면 조말생은 태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관직생활 11년 만인 태종 11년(1411) 승정원 지신사(知申事·세종 때 도승지로 명칭이 바뀌고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에 오른다. 그리고 태종 18년에는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와 병조판서에까지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 오십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긴 했지만 전권을 갖고 있던 상왕 태종은 모든 중대사를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그리고 병조판서 조말생의 ‘트리오’와 상의했다.
 

세종은 일단 아버지의 신하들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에 조말생은 계속 병조판서를 맡았다. 그러나 세종 8년 조말생의 뇌물수수사건이 발생한다. 경우에 따라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돼도 눈감아주던 세종도 조말생에 대해서는 상당히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지신사에서 병조판서까지 10년 이상 정무(政務)를 잡은 사람으로 조말생 같은 사람이 없었는데 결국 이런 사건이 터지고 마는구나!”
 

세종이 조말생의 뇌물사건을 강하게 문제 삼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조말생의 권력이 너무 커져 신하들조차 조말생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조말생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일 때 세종은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을 불러 이렇게 다그친다.
 

“어찌하여 지금 대간은 사실이 벌써 드러났는데도, 권력 있는 사람이 관련되어 있으면 즉시 다시 추궁하여 심문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조말생은 능력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지존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셈이었다. 이것으로 조말생은 ‘조선 제1호 장원급제 출신 정승’의 명예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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