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가을이 소걸음으로 왔다가 잰걸음으로 달아나려 한다. 그 찰나에 절정의 단풍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꽃피는 봄날보다 더 아쉽고 허망한 계절이 바로 이맘때의 단풍철이다. 특히 다른 지역보다 일찍 단풍이 드는 영서 내륙의 단풍 명소는 절정기에 맞춰 찾아가기가 매우 어렵다. 수백을 헤아리는 우리나라 자연휴양림 가운데 단풍 곱기로 첫손에 꼽히는 인제 방태산자연휴양림이 그 대표적인 곳이다.
예부터 강원 내륙 첩첩산중에는 ‘삼둔사가리’라고 불리는 비장처(秘藏處·난리를 피해 숨어 살 만한 곳)가 전해온다. 달둔, 살둔, 월둔의 둔과 적가리, 연가리, 명지가리, 아침가리의 사가리가 바로 그곳이다. 홍천군과 인제군 일대에 흩어져 있는 삼둔사가리는 예나 지금이나 오지 중 오지로 손꼽힌다. 그중에서도 특히 방태산(1천4백35미터)의 북쪽 기슭에 자리한 적가리골은 골짜기가 깊고 숲이 울창해서 언제 찾아가도 속세와의 단절감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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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태산은 구룡덕봉(1천3백88미터)과 함께 강원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봉이다. 한때 군부대 주둔지였던 구룡덕봉은 정상까지 찻길이 개설돼 있어 지금도 사륜구동 차들이 심심찮게 들러 가곤 한다. 구룡덕봉 정상은 탁월한 조망을 자랑한다. 방태산과 구룡덕봉 일대의 산자락과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고봉과 고봉을 잇는 굵은 멧부리들이 사방팔방으로 가없이 펼쳐져 있다.
대체로 산봉우리가 높고 숲이 울창하면 골짜기가 깊고 계류도 풍부하다. 방태산 북쪽 기슭에는 적가리골 이외에도 대골, 골안골, 지당골 등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실핏줄처럼 뻗어 있다. 하지만 이 일대 여러 골짜기들의 맏형은 역시 적가리골이다.

적가리골은 항아리 속처럼 생겼다. 구룡덕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적가리골의 지형지세는 마치 동그란 항아리의 속처럼 아늑하고 은밀해 보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6·25전쟁 직후까지 이곳에 살던 70여 가구의 주민들은 대부분 <정감록> 등과 같은 옛 비결의 예언을 믿고 멀리 함경도 등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산줄기는 둥그렇고, 그 안쪽의 골짜기는 움푹하게 꺼져 있어서 ‘까마득한 옛적에 대형 운석이 떨어진 자리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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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태산 능선은 구룡덕봉을 사이에 둔 채 백두대간의 본줄기와 맞닿아 있다. 산마루의 양쪽 비탈에는 박달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등의 활엽수가 울창해서 그야말로 수해(樹海)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숲 바닥에는 고비, 관중 따위의 양치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열대 밀림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저마다의 빛깔로 철따라 피고 지는 여러 풀꽃들로 숲은 늘 화원을 이룬다. 봄철에는 복수초, 노루귀, 괭이눈, 처녀치마, 현호색,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얼레지, 모데미풀, 한계령풀, 큰연령초 등의 꽃이 피고 여름에는 금강초롱, 동자꽃, 참당귀, 하늘나리, 말나리, 여로, 절굿대 등이 지천으로 피고 진다. 그리고 가을이면 개미취, 두메부추, 쑥부쟁이, 투구꽃 등이 소담스럽게 피어난다.

방태산 적가리골의 비경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1997년 국립방태산자연휴양림이 개장된 뒤부터다. 그 이전부터 개설돼 있던 임도를 다듬어 진입로를 만들고, 계곡 중간의 풍광 좋은 곳에는 산림문화휴양관(통나무집), 야영장, 정자, 나무다리 등의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 휴양림의 유일한 숙박시설인 산림문화휴양관의 침실 앞쪽에는 커다란 통유리창이 설치돼 있어 커튼만 열어젖히면 적가리골의 때 묻지 않은 자연 풍광이 고스란히 방 안으로 들어온다.
적가리골의 비경은 산림문화휴양관을 지나면서부터 하나둘씩 자취를 드러낸다. 휴양관 바로 앞쪽의 물가에는 작은 폭포와 소(沼)가 곱게 물든 단풍과 조화를 이룬 마당바위가 있다. 거기서 길을 따라 4백 미터쯤 더 올라가면 적가리골 최고의 절경인 이단폭포(이폭포저폭포)가 나타난다. 각각 10미터, 3미터쯤 되는 두 개의 폭포로 이뤄진 이단폭포 주변에는 단풍나무를 비롯한 각종 활엽수가 울창하게 둘러쳐져 단풍 곱게 물든 가을날의 풍광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단폭포 위쪽으로도 길은 계속 이어진다. 원색의 단풍잎이 둥둥 떠가는 물길 위에는 작은 나무다리가 하나 걸쳐 있어 동화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이 다리를 건너 조금 더 오르면 야영장이 나오고, 바로 그 위쪽에서 찻길이 끝난다. 그리고 본격적인 탐방로가 시작된다.
방태산의 깊은 속내를 더 알고 싶으면 정상까지의 산행도 시도해볼 만하다. 정상까지는 약 4킬로미터로 왕복 4, 5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찻길 종점에서부터 시작되는 숲체험 코스만 이용해도 풍광 좋고 숲이 울창한 방태산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총길이가 2킬로미터가량 되는 이 코스에서는 활엽수림, 조릿대숲, 낙엽송숲, 소나무숲 등 다양한 형태의 인공숲과 천연숲을 지나게 된다. 대체로 길이 평탄하고 뚜렷해서 어린아이들과 함께 둘러보기 좋다. 순환코스인 이 탐방로를 둘러보는 데는 대략 2시간이 걸린다.
숲길에서는 최대한 여유 있고 자유스러워야 한다. 시간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잠시 쉬어가고, 한자리에 눌러앉아 있기도 힘들거든 다시 걸으면 된다.
잠시 초록빛 카펫을 깔아놓은 듯이 푸른 이끼로 뒤덮인 물가에 앉아서 자연이 쏟아내는 교향악에도 귀 기울여보자.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덧 자연과 자신이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아니, 깨달음도 없고 느낌도 없이 그저 모두가 의자연(依自然)하여 너와 내가 따로 없다. ‘완벽한 평화의 경지’이며, ‘청산(靑山)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도 절로 절로/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라는 옛 시조 구절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마련이다.
글과 사진·양영훈(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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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