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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남원 매동마을~함양 금계마을 지리산길


명산 지리산은 높고도 크다. 주봉인 천왕봉(1915미터)을 비롯해 반야봉(1732미터), 노고단(1507미터) 등 해발 1천5백미터 이상의 고봉만도 20개가 넘는다. 이처럼 높고 큰 지리산을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등산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수많은 등산객이 분주하게 오르내리는 등산로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제대로 교감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 안에서는 정작 지리산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앞서 가는 사람들의 등산화와 빼곡한 나무뿐이다. 지리산의 장쾌한 능선과 우람한 자태를 온전히 감상하려면 지리산길에 올라서야 한다. 지리산 자락의 마을과 사람을 만나고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문화를 알려면 지리산길을 걸어봐야 한다.

지리산길은 국내 최초로 개발된 장거리 도보길이다. 산길이면서도 수직으로 오르는 길이 아니라 수평으로 이어진다. 정상 정복을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지리산길은 사단법인 ‘숲길’이 산림청 녹색자금의 지원을 받아 하나둘씩 개발해나가고 있다. 개발이라고 해서 산을 깎거나 땅을 파고 나무를 잘라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부터 주민들이 이용했던 옛길, 고갯길, 숲길, 오솔길, 논두렁길, 마을길 등의 흔적을 되살려 서로 이어줄 뿐이다. 오는 2011년에 이 사업이 끝나면 총 3백여 킬로미터의 지리산 둘레를 완벽하게 한 바퀴 도는 순환형 도보길이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4월 제1, 2구간 개통과 함께 처음 열린 지리산길은 2009년 5월 현재까지 3개 구간에 걸쳐 총 30킬로미터가 개통됐다. 5월 하순쯤 함양 세동~산청, 남원 월평~주천 간의 구간이 개통되면 지리산길의 총길이는 약 70킬로미터로 늘어나게 된다. 그중 남원 매동~함양 금계 간의 제1구간을 5월의 첫 주말에 한나절 동안 가족과 함께 걸었다.




본격적인 걷기에 앞서 지리산길 안내센터를 찾았다. 지리산길에 대한 각종 안내자료와 조언도 구하고, 안내센터 앞에 마련된 무료주차장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오전 10시인데 주차장에는 빈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이미 차들이 들어차 있었다. 제1구간 시작점인 매동마을 마을회관 주변의 주차장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만 봐도 지리산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매화를 닮았대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앞으로는 지리산 능선이 바라보이고, 뒤로는 울창한 대숲과 솔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아늑한 느낌을 준다. 이 마을을 지나는 지리산길은 솔숲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시작되는 비탈길이 끝 간 데 없이 계속되지만, 진한 솔향기를 가득 품은 산들바람 덕에 비탈길의 고단함과 지루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매동마을부터 줄곧 완만하게 고도를 높여온 콘크리트길이 끝날 즈음에 지리산길은 푹신한 흙길로 갈아탄다. 수령이 3백년도 넘었다는 개서어나무 고목도 만나고, 어느새 철쭉 군락지와 숲으로 변한 묵논(농사를 짓지 않고 묵혀둔 논) 지대를 거쳐 중황마을에 이르기까지 지리산길은 산허리를 타고 수평으로 이어진다. 온종일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은 평탄하고 편안하며 아름다웠다.

산내면 중황·상황마을의 농로와 논두렁길을 지나는 지리산길은 지리산 쪽으로 시야가 훤히 열려 있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지리산 서북릉의 덕두산(1150미터), 바래봉(1165미터)뿐 아니라 1백여 리의 지리산 주릉까지도 아스라이 보인다. 이처럼 시야가 활달한 것은 크기와 형태가 제각기 다른 다랑이논들이 산 중턱에서 산 아래 큰길까지 수십 층의 계단을 이룬 때문이다.

특히 상황마을 일대 다랑이논은 산내면에서 가장 넓다는 실상사 들녘보다도 많은 소출을 내는 문전옥답이었다. 하지만 한때 이 작은 산촌에 천석꾼도 살았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로만 남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농사짓기가 힘들다 보니 묵논으로 방치되거나 고사리밭으로 탈바꿈한 다랑이논이 적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모심기를 앞두고 물이 가득한 다랑이논의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손바닥만한 논에도 봄날의 눈부신 햇살과 파란 하늘, 녹음 짙어 가는 지리산 연봉이 모두 담겼다.

고2 아들과 함께 부산에서 왔다는 중년의 아주머니는 “워낙 산을 좋아해서 지리산을 셀 수도 없이 많이 와봤지만, 이렇게 멋진 길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사춘기 소녀처럼 설레고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필자의 큰애도 “이 길 정말 괜찮은데요. 풍경도 좋고 공기도 깨끗해서 몸이 붕 떠오를 것 같아요”라면서 다른 계절에 한 번 더 그 길을 걸어보자고 제안했다.




[SET_IMAGE]2,original,right[/SET_IMAGE]마지막 전라도 마을인 상황마을과 첫 경상도 마을인 창원마을 사이에는 해발 7백미터의 등구재가 있다. 거북이 등처럼 생겼다는 등구재는 널찍한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 두 마을 사람들이 오가며 정을 나누고 혼담도 주고받던 옛길이다. 창원마을 사람들이 근동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남원 인월장을 오갈 때도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준령(峻嶺)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지만, 지리산길 제1구간에서는 가장 힘든 구간으로 꼽힌다. 그래도 중간쯤에 걸음을 한번 멈추고, 잠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고 나면 단번에 고갯마루에 올라설 수 있다.

등구재 고갯마루을 넘어선 길은 곧게 뻗은 낙엽송 숲길로 이어진다. 숲 터널을 벗어나 등구재 고갯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등구재 너머 쉼터’가 있다. 음료수, 맥주, 막걸리, 라면 등의 요깃거리와 검정콩, 고춧가루, 곶감 같은 농산물을 판매하는 무인 쉼터다. 주민들이 지리산길을 찾는 여행자들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상징하는 곳 같아서 이용자들은 괜스레 한 번 더 자신을 추슬러보게 된다.  

등구재 내리막길은 곧장 창원마을의 다랑이논길로 이어진다. 사방천지가 온통 첩첩산중인데도, 그 사이사이 층층한 들녘은 의외로 넓다. 주로 논두렁길이거나 다랑이논 사이로 구불거리는 창원마을의 지리산길도 시야가 시원스럽다.

주봉인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을 거쳐 쑥밭재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창원마을 논두렁길이 끝나는 곳에서 제1구간 종점인 금계마을로 가는 도중에는 다시 조붓한 숲길을 지난다. 시야가 꽉 막힌 숲길을 20여 분 걷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훤해지면서 한층 우람한 자태의 천왕봉이 우뚝하다.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칠선계곡의 움푹한 골짜기도 눈앞에 다가와 있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뭔가를 이뤄냈다는 성취감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지리산길은 눈보다는 마음이 즐거운 길이다. 이름난 풍광과 빼어난 절경이 아니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확 잡아끄는 마을과 풍경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산행보다는 걸음이 더디고, 같은 거리라도 시간이 더 걸리게 마련이다. 그게 자연과 인간, 농촌사람과 도시인이 서로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는 지리산길만의 매력이다. 

글과 사진·양영훈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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