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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최근 발표된 한국사회에 대한 신뢰도조사는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상당히 충격적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문’이라는 행위가 우리사회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인적 연결망의 파괴를 쉽게 짐작케 한다. 방문은 타인의 마음을 여는 첫 단계이다. 그 유용성은 종교단체의 중요한 선교수단으로, 그리고 기업의 강력한 판매기법으로 현재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신동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방문자’는 최근 우리 영화계를 휩쓸고 있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앞으로는 대중의 열광에 현혹되지 않겠다는 오기(?)를 가져볼 만하지 않는가. 우리가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삶의 방식을 되찾을 수 있는 일련의 과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전공한 시간강사 호준은 온갖 사회적 불균형의 덫 속에서 몸부림치는 남자다. 그리고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선교사로 매일 타인을 방문하는 계상은 인간성이 배제된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남자다. 우리사회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의식면에서 양극을 달린다는 점에서는 이질적이다.

선교사 계상의 방문과 호준의 거부로 시작되는 영화는 타인과 타인이 만나 화해하고, 관계성을 가지기까지의 진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 사회에서 주된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들은 자기 신념을 추구하다 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사람들의 아픔과 어둠을 비추는 거울로 관객에 다가선다. 서로 다른 세계에 있던 두 사람이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 평범한 일상처럼 보이는 이 행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에게 스스로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사람 간의 만남 역시 하나의 문화적 충돌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고 영화를 통해서만 세상을 만나려 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선정적 유혹들이 난무하는 일상 속에 비틀거리는 호준에게 계상은,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다. 경제적 가치가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는 현실에서 기초적인 생활마저 위협받고, 삶의 아픔과 분노로 힘들어하는 두 사람이 겪는 충돌은 우리사회 약자들의 항변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타인과 직접 만나는 ‘방문’이라는 행위에 대해 보다 확장된 의미를 건져올린 건 또 다른 수확이다. 방문은 관계의 시작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한 인간을 진정으로 만나는 것은 나의 인간적 경계를 넓히는 살맛나는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쉽게 만나지 못하는 건 행여 ‘정체성을 찾으라’는 이 시대의 화두에 세뇌당한 것은 아닐까. 정체성을 찾는 일은 자신 외에 타인을 간과하고, 연대와 공존을 파괴하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인종적, 경제적, 직업적, 종교적 정체성이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넓히고, 갈등 구조를 심화시키고 서로의 골을 깊게 만드는 건 아닌가. 

아민 말루프의 ‘사람잡는 정체성’은 이런 점을 경계하는 지침서로 참고할 만하다. 
아랍국가 출신이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말루프의 고뇌가 진하게 담겨 있는 이 책은 정체성이 배타성과 거부의 근거가 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집단의 정체성을 배타적 잣대로 내세울 때 폭력의 악순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혜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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