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스나이퍼’ 장성호가 KIA 타이거즈를 떠나 한화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1996년 해태에 고졸 루키로 입단해 15년 동안 주전으로 활약하며 9년 연속 타율 3할을 기록했고, 통산 1천7백41안타로 2천 안타에 도전하는 몇 안 되는 타자, 장성호. 그는 고향은 서울이지만 광주에서 성공했다. 광주에 터를 잡고 광주 여자와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먹고살 만한 재산도 있다. 부러울 게 없는 그가 지난 1월 트레이드를 자청해 15년 동안 정든 광주를 떠났다. 그렇다면 장성호는 왜 KIA를 떠나려고 했을까.
장성호 문제가 촉발된 것은 2009시즌을 마친 뒤 FA 시장에서였다. 두 번째 FA(자유계약) 권리를 얻은 장성호는 예상을 깨고 돌연 FA를 선언하며 타 구단 이적을 추진했다. 성적이 신통치 않은 FA 자격 취득선수들은 대개 FA 선언을 하지 않고 1년 재계약을 통해 다시 상품성을 높이는 쪽을 택한다. 30대 중반에 들었고 지난 4년간 명성에 비해 다소 성적이 부진했던 장성호는 당연 재계약이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KIA가 자신의 존재감을 무시하고 나선 게 가장 큰 이유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는 조범현 감독이나 구단이 자신을 주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러 통로를 통해 알아봤다. 결국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결론이 섰고, 마침 ‘FA 계약을 할 수 없다’는 구단의 통보를 받자 FA를 선언하며 맞불을 놓았다. KIA를 떠나겠다는 선언적 의미였다.
그러나 FA 교섭기간 중 타 구단의 ‘입질’은 없었다. 한화가 눈독을 들이긴 했지만 20억원이 넘는 높은 보상금 때문에 포기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1월 중순 FA 계약 마감 직전 KIA와 3억원이 삭감된 2억5천만원에 1년 재계약 사인을 한 장성호는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 팀에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이별의 조짐은 이미 2007년부터 잉태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KIA는 메이저리거 최희섭 영입을 추진했고 5월 입단을 성사시켰다. 10년 넘게 1루를 지켜온 장성호에게는 위기였다. 하지만 최희섭이 슬럼프에 빠지는 통에 얼마간은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07시즌 KIA가 꼴찌로 추락하면서 서정환 감독과 정재공 단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조범현 감독과 김조호 단장 체제가 새롭게 들어섰다. 김 단장은 조 감독에게 일절 선수기용 등에 관여하지 않고 감독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했다. 조 감독에게 전권이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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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2007년 시즌 중반 배터리 코치로 부임해 KIA 내부를 유심히 관찰해온 조 감독은 KIA에 세대교체가 절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수들의 의식이나 훈련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도 조 감독의 충암고 후배인 장성호는 2008시즌 전 선수단 상조회에서 주장으로 뽑혀 새로운 팀 체제 적응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해 시즌을 치르면서 조 감독의 신뢰는 조금씩 무너져갔다. 장성호는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 것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몸이 아픈 장성호가 소화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조 감독은 9월 13일 추석 연휴 첫날 두산과의 잠실 경기를 앞두고 장성호를 2군으로 내려보냈다. 이유는 부상이었다. 장성호는 이후 1군 복귀 없이 시즌을 마쳤고 주장 완장을 내려놓았다. 대개 주장이 2년 정도를 하는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런 장성호의 입지를 더욱 불안하게 한 것은 최희섭의 부활이었다. 최희섭은 2008년 최악의 시즌을 보낸 뒤 미친 듯이 등산에 매달려 육체개조에 성공한다. 그래도 조 감독은 장성호와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09시즌 두산과의 개막전에 선발 1루수로 출전시켰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최희섭이 붙박이 4번 타자 겸 1루수로 기용되면서 장성호는 좌익수, 지명타자 등을 전전하다 2군으로 강등됐다. 2009시즌 초반 3승1무6패의 초라한 팀 분위기에서 맞은 4월16일, 3연전 두 번째 경기에서 0-1 완봉패를 당했음에도 그가 다음 날 새벽까지 고우석과 함께 심야 포장마차에 있던 것이 알려지면서 조 감독을 뿔나게 만들었다.
장성호는 12일 만에 1군에 복귀했지만 나지완, 최희섭, 김상현이 펄펄 나는 동안 벤치에서 그들을 구경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같은 팀 내 위상변화가 트레이드의 불씨가 됐다. 장성호의 트레이드는 그가 KIA에서 뛴 그 오랜 시간만큼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두산, 넥센, 한화 세 구단과 협상창구에서 오간 선수들만 해도 20명이 넘었다. 장성호는 1군행을 거부하며 트레이드를 기다렸지만 번번이 무산되자 은퇴까지 생각할 만큼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트레이드 성사 소식을 접한 장성호는 “KIA를 떠나면 좋을 것 같았는데 무덤덤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만큼 자신도 KIA에 대한 애정과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졸 루키로 입단한 그는 ‘코끼리’ 김응룡 감독의 애정 속에서 김성한과 김종모 타격코치의 혹독한 조련을 참고 견디며 3할 타자가 됐다. 고교시절 야구에 흥미를 잃고 숱한 방황을 겪었지만 프로에서 멋지게 성공했다. 그러나 친정팀과의 마지막 궁합은 맞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무등 야구장에선 스나이퍼를 향한 응원가를 들을 수 없게 됐다.
글·이선호(OSEN 야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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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