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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문화예술인 인터뷰 달인 문화캐스터 서주희




 

‘문화캐스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뉴스캐스터’ ‘기상캐스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캐스터’란 보도 프로그램의 진행자 혹은 해설자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문화캐스터’는 ‘문화’라는 콘텐츠를 소개하고 해설하는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을 터다.

국내 최초 문화캐스터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 중인 방송인 서주희(30) 씨. 우리 문화계 구석구석에서 숨은 보석을 찾아내 소개하는 작업을 해온 지 올해로 8년째다. 2004년 국악방송에서 아나운서로 문화 관련 뉴스를 전달하다 같은 방송의 <문화사랑방> 프로그램에서 문화 공연 현장 인터뷰 코너를 맡게 됐다. ‘문화’라는 코드에 집중해 한 우물을 파기 시작한 계기다. 문화캐스터라는 별칭도 이때 얻었다.

문화재급 장인(匠人)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의 일이다. 문화캐스터라는 이름이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흙 속에 묻혀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장인들, 그들에게 묻은 흙 떨어내고 감춰진 빛 밝혀내 방송을 통해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장인들을 만나왔고, 그가 만난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국악방송(서울 경기지역 FM 99.1메가헤르츠, 남원 일원 FM 95.9메가헤르츠, 남도 일원 FM 94.7메가헤르츠) <꿈꾸는 아리랑> 프로그램 ‘서주희가 만난, 맛난! 우리 문화’ 코너에서 매주 수요일 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그는 KBS 한민족방송 <오늘과 내일> <가요코리아> 프로그램 등에서 해외 동포들에게 서울의 삶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코너에 출연 중이다.

그의 꿈이 시작된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에서였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그는 졸업반이었던 2002년 미국 오레곤주립대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다.

“영어 공부를 위해 기숙사에서 줄곧 TV 토크쇼 프로그램을 보곤 했는데, 그때 방송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특히 방송과 관련된 여러 직종 가운데에서도 직접 사람들과 만나 그들과 소통하고 스스로 방송 원고도 작성하는 등 능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리포터’였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2004년 5월 KBS 라디오 리포터로 방송에 첫 발을 내디딘 후 국악방송과 연이 닿았다. 그리고 그가 꿈꾸었던 바대로 직접 현장을 취재하고 원고를 작성하면서 스튜디오에서 진행까지 하는 1인 3역을 해왔다.
 

이후로 그가 만나온 문화계 인사는 2백50여 명. 유명인사일수록 사전에 취재 약속을 잡기 어려웠다. 무작정 마이크를 들고 현장으로 찾아가곤 했다. 취재 대상의 행사 당일 동선(動線)을 파악해서 곁에 따라붙으며 코멘트를 땄다. ‘헝그리 정신’이었다.

대부분 대쪽 같고, 혹은 과묵하거나 어눌하기도 하며, 때로는 까다로운 장인들을 만나 마음을 열고 속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래 사용하지 않던 우물에서 물을 끌어올리려면 마중물이 필요하다. 그에게 장인들의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마중물은 ‘노래’였다.

“장인들께 술을 마실 때 즐겨 부르는 노래 한 곡을 불러달라고 청해요. 자주 부르는 노래에는 그 사람의 삶이 배어 있게 마련이죠. 함께 박자를 맞추어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을 열게 되는 거예요.”

그랬다. 그가 만난 장인들, 그들이 부른 노래에는 삶의 고비 고비마다 깃든 애환이 담겨 있었다. 경기도의 북 장인 임선빈 선생. 고아원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고아원 형들에게 맞아 한쪽 귀를 먹었다. 소아마비로 다리도 불편하다. 생활을 위해 북을 만들기 시작했다. 장인으로 지정돼 나라에서 월 1백만원을 받게 됐지만 그 돈을 북 만드는 데 쓰고 나면 먹고살 길은 여전히 막막하다. 다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살며 생계를 위해 선생은 날품을 판다. 그런 그의 노래는 나그네 설움이었다.

옹기 장인 배요섭 선생. 서울에 단 하나 남아 있던, 그래서 그가 옹기 굽는 작업을 할 수 있었던 신내동의 옹기 가마가 재개발 때문에 없어졌다. 옹기 구울 곳이 주변에 없다. 하는 수 없이 선생은 옹기를 만들어 두었다가 경기도 이천에 한꺼번에 싣고 가서 구워올 수밖에 없게 됐다. 선생의 노래는 ‘번지 없는 주막’. 서 씨는 선생에게 가사 중의 ‘주막’을 ‘가마’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했고, 선생은 허허 웃으며 개사곡 ‘번지 없는 가마’를 불러주었다.

‘하늘이 내려준 춤꾼’이라는 살풀이춤 대가 이매방 선생에게서 ‘흥타령’을 끌어내 방송에 내보낸 것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약속 시간에 찾아가 뵈니 눈길도 안 주시고 바느질만 하시더라고요. 인터뷰할 생각은 젖혀두고 마주 앉아 작업 중이신 바느질에만 관심을 보여드렸어요. 이것저것 바느질에 대해 묻고, 바늘귀도 꿰어 드리고,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니 ‘그래 무에가 궁금해 왔는가’라고 먼저 말을 걸어주시더군요. 워낙 어려서부터 소리를 배우셨으면서도 춤 인생을 시작하신 이후 한 번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는 선생님이 결국 춤을 추시며 ‘흥타령’을 불러주셨어요.”

이런 어른들 한 분 한 분을 만나는 게 모두 보람이요, 자산이다. 하지만 안타까움도 크다. 소중한 우리 문화의 명맥을 이어가는 이들이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은 늘 발걸음이 무겁다. 장인들 대부분은 “다시 태어나면 이 길을 걷고 싶지 않다. 그만큼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서 씨는 결심을 했다. ‘이들의 입을 대신하겠다. 이들이 하고 싶은 말, 알리고 싶은 문화를 대신 세상에 널리 전하겠다. 하루가 다르게 그 수가 줄어가는 우리의 장인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만나 기록하겠다. 이것이 나의 소명이다.’

그 자신 ‘유명한 인물들을 만나러 다니는 인터뷰어’였다면 훨씬 더 주목받는 방송인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 방송인으로 이름을 얻는 것보다 소명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그는 개인의 자유 시간을 누리는 것도, 결혼 계획도 일단 뒤로 미뤘다. “나는 인터뷰와 결혼했다”고 그는 말한다.

서 씨는 기자를 만난 날에도 야생녹차 장인 김동곤 선생을 인터뷰하기 위해 항상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핸드 마이크를 챙겨들고 멀리 경남 하동으로 달려간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글·김정희 객원기자/사진·조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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