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명종 대는 조선의 대표적인 폭정(暴政)시대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와 그의 아우 윤원형이 모든 것을 좌우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폭정의 실상을 무마하고 식자층을 회유 내지 위로하기 위함이었는지 명종 재위 때는 거의 매년, 한 해 두 번씩도 과거가 실시됐다. 원래는 3년에 한 번이 정상이다.
명종 16년(1561년) 식년시에서는 이산해(李山海)가 급제했고 명종 17년(1562년) 별시에서는 정철(鄭澈)이, 명종 19년(1564년) 식년시에서는 이이(李珥)가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선다. 선조 때 당쟁이 시작되면서 동인을 이끌 이산해와 서인을 이끌 이이, 정철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어려서 신동(神童)으로 불린 이산해와 이이의 관직생활을 비교해보는 것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이는 장원급제를 하여 처음 정6품 호조좌랑에 임명된다. 이산해는 3년 먼저 급제했지만 장원이 아니었기에 종9품에서 출발했다. 이산해가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거쳤다면 이이를 따라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산해는 명문가의 자손인 데다 과묵하면서도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어 당대 최고의 실력자 윤원형이 사위 삼으려 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특진을 거듭해 명종 19년 이산해도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된다. 같은 정6품이지만 ‘요직’이라는 측면에서 이산해가 앞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당대의 실력자 윤원형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지만 확실한 후원자가 없던 이이는 여러 가지로 불리했다. 이이는 명종 20년 정언으로 임명된 이후 이듬해 다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 정6품직을 오가다 선조의 즉위를 맞는다. 한편 이산해는 정언을 거쳐 정5품 홍문관 교리(敎理)에 올라 선조의 즉위를 맞는다.
이이와 이산해는 시기만 다를 뿐 선조의 큰 총애를 받았다. 이이는 경학(經學) 쪽으로, 이산해는 행정과 문학 쪽으로 최고를 자부하던 신진 기예였다. 선조의 즉위는 두 사람 모두에게 기회였다.
선조 1년(1568년) 1월 선조는 이이를 홍문관 교리로 임명한다. 이이는 경연에 참석해 선조의 학문 연마를 돕는다. 선조 5년 이이는 홍문관 응교(應敎·정4품)로, 이듬해에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정3품 당하)에 오른 다음 같은 해 말 정3품 당상관인 승지에 임명된다. 이이 본인으로서도 현기증을 느낄 만한 고속승진이다.
이산해의 승진 속도는 더했다. 선조 3년 직제학을 거쳤으니 이이보다 2, 3년 정도 앞서가던 이산해는 선조 4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정3품 당상관)에 제수된다. 그리고 이이가 응교로 있던 선조 5년에는 이조참의가 된다. 홍문관이나 사간원이 관찰하는 곳이라면 이조참의는 실무를 다루는 자리다.
![]()
그러면 누가 먼저 정2품 판서에 오르게 될까? 이산해는 선조 13년(1580년) 10월 20일 형조판서에 특별 임명된다. 한편 선조 7년 병으로 사직했던 이이는 얼마 후 복직해 황해도 관찰사로 잠깐 근무한 후에 선조 11년까지 사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대사간에 머무른다. 이 시기는 동서당쟁이 본격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산해가 판서에 오르던 선조 13년 9월 이이는 부제학에 머물러 있다. 이듬해 이이는 대사헌을 거쳐 호조판서에 임명된다. 이산해보다 1년 뒤졌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이이의 시대’였다. 병조·이조판서를 두루 거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조 17년(1584년) 이이는 쉰을 바라보던 나이에 아쉽게 세상을 떠나 정승에 이르지 못한 반면 이산해는 70세를 넘기며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산해보다는 이이를 더 기억한다. 생전에 영예를 누린 이산해와 죽어서 불멸의 명예를 누리는 이이, 공직자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양자택일 문제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