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히브리 성서 창세기에는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며 도시를 세우고 하늘에 닿게 탑을 세우려던 이야기가 나온다. 신은 인간의 교만을 경계하기 위해 사람들의 말을 뒤섞는다. 결국 사람들은 온 세상으로 흩어지고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 불렀다. 흩어진 세계의 사람들이 현재의 시점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되어 구성된 이야기가 영화 ‘바벨’이다. 바벨은 소통의 방법을 잃은 인간의 혼란과 분열을 상징한다. 모로코의 산악지대, 미국의 샌디에이고, 멕시코의 국경지대, 도쿄 등을 배경무대로 해서 네 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발점은 한 자루의 총이다. 모로코의 산악지대에서 염소를 치며 살아가는 압둘라는 자칼을 사냥하던 관광객이 남기고 간 총을 사들인다. 총이 생기면서 압둘라의 아들 간에는 경쟁심이 생기고 그 총에 관광왔던 미국인부부 가운데 부인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상황은 테러로 오해받으며 국제문제로 비화한다. 총의 원래 주인이었던 일본인 역시 아내가 자살한 후 청각장애인 딸과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다. 미국인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던 멕시코인 보모 아말리아는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들과  멕시코에 다녀오다 국경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절박한 순간에 도달해서야 자신만의 고립된 세계에서 빠져나와 상대를 받아들인다. 고통 속에서 확인되는 애정이다. 그들은 난관 속에서 오히려 내면의 경계를 뛰어 넘는다. 인간을 분열시키고 소외시키는 것은 언어가 달라서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대립과 마음의 거리감이었다.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은 진지하고 생생한 연기로 실재감을 전해준다.

멕시코 출신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테러공포에 빠진 미국인들의 과잉반응과 이기심을 냉정하게 비판한다. 모로코와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수사와 차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고발한다. 감독은 가장 어두운 시기에 큰 빛이 되어준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했다. 그런 만큼 영화 ‘바벨’에서도 소통의 가능성과 희망을 남긴다. 고발적 시선도 있지만 인간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볼 수 있다. 종족과 문화를 초월해서 인간이기에 가지는 연민과 연대감이 희망이다.

 생존경쟁에 대한 강박감과 타인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은 우리의 삶을 강퍅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것이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김영범 옮김, 르네상스 펴냄)는 상호부조의 중요성을 윤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생물학과 인류 역사적 차원에서 입증하고 강조한다. 1888년 토마스 H. 헉슬리가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이론을 발표하자, 크로포트킨은 이를 반박하기 위해 자연과학적인 자료들을 통해 상호부조론을 옹호하는 이론을 수립했다. 헉슬리의 능력주의는 잔혹한 우생학으로 연결된다. 집단 이기심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이용된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의 사례들을 체험하고 연구해서 1914년 1차대전 중에 인간의 건설적인 힘에 대한 믿음과 민족 간의 이해 증진을 바라며 상호부조론을 펴냈다.

한국사회도 역사적 위기와 급변하는 국제 상황에 숨 가쁘게 대처해왔다. 시장경제주의에 바탕한 경쟁만을 강조할 때 양극화가 심화되고, 사회에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기류가 형성되는 것이다. 조급하고 이기적인 인성만으로는 인간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경쟁만이 아니라 협력이 인류를 진화시켜온 또 하나의 원동력이었음을 인정하고 부각시키는 시각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런 점에서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심도 있게 읽어 볼 만한 고전이다.

정혜경 <자유기고가>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