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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안방극장 고졸·지방대 출신 캔디 뜨다




10년이다. 고졸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해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며 무시당한 세월이. 그래도 꿈이 있었다. 마당 있는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언젠가는 결혼해 아이도 낳고 싶어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암이란다. 이름도 생소한 담낭암. 남은 시간은 길어야 6개월이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부장님은 여전히 구박을 멈추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녀는 5년간 품어 온 사표를 던진다. “개자식아”라는 통쾌한 욕설과 함께. 이 장면에 “속이 시원하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지난달 23일 시작한 SBS 주말드라마 <여인의 향기>의 이연재(김선아 분) 얘기다. 시청률 15퍼센트대를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다.

TV 드라마에 ‘고졸 여주인공’이 부쩍 늘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여인의 향기>의 이연재, MBC <반짝반짝 빛나는>의 황금란(이유리 분), 얼마 전 종영한 MBC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이다해 분), KBS 2 <동안미녀>의 이소영(장나라 분) 등이 모두 ‘고졸 캔디’들이다.

이들 드라마 모두 고졸 여성이 겪는 아픔과 설움을 통해 ‘학력사회’ 한국의 어두운 면을 조명한다. 학벌에 따라 위너(승자)와 루저(패자)가 갈리는 문제가 드러난다. 화려한 캐릭터를 앞세우는 트렌디 드라마의 틀을 깨고 있다.




이만제 한국콘텐츠진흥원 연구원은 “은행의 고졸 채용이 증가하는 등 고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 관심에 비해 아직까지 처우는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녹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과거 드라마에서는 전문직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여성의 성공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지만, 스펙 사회에 대한 피로도가 누적되면서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고졸이 주인공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도 “더 첨예해지고 있는 스펙사회 때문에 당분간 (고졸 주인공이) 주목을 받을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고졸 여주인공들의 공통점은 모두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점이다. 이연재는 1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해 왔지만 연봉이 2천만원 선에서 오르지 않고 있다. 상사에게 인격 모독과 성추행을 당해도 그저 참고 넘길 뿐이다. 장미리와 이소영은 고졸이라는 이유로 아예 취업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이소영의 말을 빌리자면 “처음부터 속이려 했던 건 아니다”며 “14년 동안 다녔던 원단회사에서 해고당한 뒤 서른넷 고졸 출신인 그녀에게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정덕현 평론가는 이를 두고 “고졸 여성을 ‘약자 중의 약자’로 설정한 후 이들의 처지에서 시청자들이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기 위한 극적 장치”라고 설명한다.

실제 트위터와 인터넷 게시판 등에는 유독 이연재가 부장에게 사표를 던지고, 복수하는 장면을 언급한 글이 많다. “고졸이라고 해서 하는 일이 다르지 않은데, 나이 어린 대졸 동료가 연재를 무시할 때 너무 화가 났다”는 의견은 물론 “부장에게 엉덩이로 사과하라고 복수하는 장면이 너무 약하니 더 통쾌하게 그려달라”는 주문도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내내 ‘민폐 캐릭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짓말과 악행을 일삼았지만, 그녀가 극한으로 몰리기까지 겪었던 설움만큼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샀다. <반짝반짝 빛나는>의 황금란이 대졸 사원과 똑같이 일하고도 퇴직금을 대졸의 절반 수준으로 받아야만 했을 때는 “부자인 친부모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금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하지만 ‘거짓말’과 ‘시한부 인생 판정’ 등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삶이 달라진다는 점은 한계로 나타났다. 장미리와 이소영은 거짓말 덕분에 취업할 수 있었고, 이연재가 상사 면전에 사표를 던질 수 있었던 건 암 판정을 받아서다.

이만제 연구원은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 해외유학을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선입견을 깰 수 있도록 (드라마들이) 화두를 던져 주는 역할을 했지만,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끝나면 파괴력이 약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학력뿐 아니라 드라마에서 다루는 약자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일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글ㆍ임주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의 여주인공 노은설(최강희 분·사진) 역도 취업 준비생들과 직장인들에게 ‘고졸 캔디’ 못지않은 공감을 얻고 있다.

통장잔고 2만원과 카드값 20만원, 학자금 대출로 생긴 대출금만 1천만원인 지방대 출신 ‘발산동 노전설’ 노은설은 방송 1회에서 시급 4천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취업준비생으로 나온다.

그는 취직을 위해 여러 회사에 면접을 보지만 번번이 ‘스펙’에서 밀린다. 자신의 열정과 자신감만큼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춤과 노래는 물론 무에타이까지 불사하지만 지방대 출신에 좋지 않은 성적 때문에 면접 시 질문조차 받지 못하는 등 비참함을 맛보게 된다.

결국 “‘후진’ 대학교 출신은 질문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냐”며 반문하고, 면접관들에게 직접적으로 “왜 자신에게 질문을 하지 않느냐”며 이의를 제기한다. 면접관들에게 ‘직격탄’을 날린 노은설은 이를 계기로 당당함과 솔직함, 열정을 인정받아 대기업 비서실에 마침내 취업하게 된다.

드라마는 웃음과 눈물로 버무러져 있지만 그 속에 사회 풍자는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1회부터 ‘본방사수’하고 있다”는 취업준비생 장진영(29)씨는 “극중 노은설이 마치 내 얘기 같았다”면서 “지방대 출신 노은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페이소스와 카타르시스가 동시에 느껴졌다”고 방송 소감을 말했다.

대학원생 이민정(26)씨 역시 “기존 드라마에서처럼 단순히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기반으로 한 재벌2세와의 로맨스를 그린 게 아니라 우리 시대 ‘스펙 없는 88만원 세대 신데렐라’ 얘기여서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씨는 “노은설이 재벌의 후광을 받아 성공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성공하는 성공기가 그려진다면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고 덧붙였다.

<보스를 지켜라> 제작진은 제작발표회 당시 “이 드라마를 통해서 유쾌함도 얻지만 현실에서 스펙에 밀려 취업 장벽을 느끼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글ㆍ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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