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선제보훈의 취지는 국가유공자가 국가에 바친 헌신과 희생의 가치를 되새기고, 일반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해 국가가 내우외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 스스로 국가수호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그간의 사후보훈 수혜자 중심의 수동적 보훈정책에서 차원을 높여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좀 더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셈이다. 이는 곧 대한민국의 국격 상승과 함께 보훈선진국으로의 진입을 선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훈정책은 원래 “국가를 위한 희생에 대해서는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의 ‘끝까지 책임론’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국가의 ‘끝까지 책임론’은 부족국가 시대를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족국가의 통치형태가 제정일치(祭政一致)였다는 사실은 그만큼 ‘제사’가 국가 유지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제사는 오늘의 보훈 행위에 해당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의 영령을 추모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남은 가족을 책임지지 않았다면, 해당 부족국가는 곧 패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국가가 희생자 추모를 게을리 하고, 남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뻔한 멸족을 알면서 자발적으로 희생을 자처했겠는가. 군인들에게 국토방위에 전념케 하고, 일반 국민들에게 나라사랑정신을 일깨우는 데 국가보훈 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대한민국의 보훈정책 역시 시기에 따라 보상 수준의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국가는 끝까지 책임에 입각해 국가유공자들 본인, 그 가족 및 유족에게 보훈급여금 지급, 취업지원, 의료지원, 대부지원, 교육지원 등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나라가 가난한 시절에는 보훈 혜택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으나, 나라살림의 형편이 향상되면서 보훈혜택 역시 꾸준히 늘어났다. 사실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와 같은 서방선진국들은 하나같이 보훈선진국이다. 우리 역시 이제 선진국 문턱에 접어들었으니 선진 보훈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의 경우 근현대사가 국난극복의 역사로 점철되다 보니 보훈의 영역과 대상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많다는 점이 국가보훈의 선진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국가보훈은 7개 법률이 관할하는 28개 유형으로 나뉘어 있다. 가히 ‘보훈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그러다 보니 보훈대상 간 보상 수준에 대한 형평성 문제 제기가 뒤따르기 십상이다. 보훈대상자들의 민원과 보훈단체들의 집단행동이 빈발해 보훈행정에도 큰 어려움이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훈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복잡한 보훈시스템을 누구든 쉽게 용인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체계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금년 7월부터 보훈대상을 국가안보, 국민의 생명·재산보호와 직접 관련이 있는 희생자인 ‘국가유공자’와, 국가유공자는 아니지만 국가책임 차원에서 보상이 필요한 ‘보훈보상대상자’로 구분하기로 한 것은 진일보한 정책결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국가보훈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선제보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보훈선양정책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사실 보훈문화는 기본적으로 국가 상징정책의 핵심 기제 중의 하나에 속한다.
프랑스가 보훈선양정책을 특별히 ‘기억의 정치’로 여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길거리나 광장, 그리고 국가적 기념시설물의 명칭은 대부분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인물들의 이름인데, 이는 자나깨나 이들의 희생정신과 영웅적 행적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임은 두 말할 필요 없다. 결국 ‘기억의 정치’는 나라사랑정신을 고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사랑정신은 ‘나’와 ‘국가’의 일체감, 즉 국가정체성 함양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국민통합에 크게 기여하기 때문에 내적 안보 역량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인종·다민족 국가인 미국이 우리의 국가보훈처에 해당하는 제대군인부(Ministry of Veterans)를 그토록 중시하고 보훈선양에 힘쓰는 이유는 바로 국가보훈이 국민통합과 내적 안보의 가장 효과적인 기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보훈만한 소프트파워는 드물다. 오늘날 국력은 대체로 스마트파워(smart power)의 크기로 파악되는데, 이는 경제력과 군사력 같은 하드파워(hard power)와 정신력, 문화력, 외교력 등의 소프트파워를 합한 개념이다.
대한민국의 하드파워의 크기는 세계 20대 강대국을 의미하는 G20, 2만달러 GDP와 인구 5천만명을 상회하는 ‘20-50클럽’ 가입으로 이미 만만치 않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정도로 볼 때 소프트파워의 크기는 선진국이 되기에 아직도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훈문화의 창달이 크게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이 아무리 대남 선전선동과 통일전선전술로 대한민국을 흔들려 해도 끄떡하지 않는 내적 힘은 물리력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통합에 기반한 ‘정신력’이 가장 중요한 힘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보훈대상자 위주의 ‘사후보훈정책’이 이제 온 국민의 나라사랑정신을 고취시키는 ‘선제보훈정책’으로 확장되어야 할 이유다.
글·오일환 (보훈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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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