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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창피한 일이지만 처음 6·25전쟁에 징발됐을 때부터 두렵고 무서웠어요. 어느덧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당시의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네요.”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자리한 서울보훈병원에서 만난 이인모(79) 할아버지는 6·25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2월 집에서 농사일을 돕다 징발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더구나 결혼한 지도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새신랑이었다.

집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전쟁터로 큰아들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두 눈엔 걱정이 잔뜩 서려 있었고, 이제 막 시집온 아내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돼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미어졌지만 “기필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는 말로 가족을 안심시켰다.

이후 5개월 가까이 군사훈련을 받은 그는 1951년 7월 수도사단에 배치되자마자 강원도 김화로 진격했다. 그 사이 그의 계급은 하사가 됐다. 김화에서는 남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국군의 격전이 한창이었다.

싸움은 매일 엎치락뒤치락했다. 중공군에 맞서 함께 싸우러 나가는 전우들도 매번 바뀌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대부분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전투를 벌이던 중 이 하사는 적군이 던진 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포탄이 쏟아져 날아오면 어떻게든 숨어야 했어요. 숨을 장소가 마땅치 않을 땐 옆에 있던 전우의 시신 밑에라도 몸을 숨기곤 했는데 그날은 제대로 맞았죠. 얼굴이 화끈거려 왼쪽 뺨을 만져보니 피와 살이 섞여 묻어나오더라고요. 군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순간 ‘이제야 후방에 갈 수 있게 됐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면 지옥이 따로 없었으니까요.”

계속된 포탄 투하로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은 벌거숭이산을 내려오니 부상한 군인들이 떼지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를 잃은 군인, 팔이 없는 군인 등 하나같이 치료가 다급해 보이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을 후송하기 위해 헬기 한 대가 착륙하려 하자 서로 먼저 오르려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헬기는 그들을 뒤로한 채 이 하사만 끈으로 매달고 서둘러 병원으로 옮겼다.

“처음 부상을 당했을 때는 몰랐는데 왼쪽 턱 부분은 물론 입술과 잇몸, 치아까지 다 뭉개져 없어졌어요. 팔이나 다리 부상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저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서 먼저 후송했다고 하더군요. 저를 구출한 미군 장교는 위생병이 압박붕대로 제 얼굴을 친친 감아주자 ‘이 하사, 다이조브, 다이조브’ 하고 말했어요. 우리말은 몰랐던지 이제 괜찮다, 살았다는 뜻으로 ‘다이조브’라는 일본말을 하더라고요.”

고향인 경북 김천에서 비보를 들은 가족들은 처음에 그가 사망한 줄로 오해했다. 전쟁터에서 날아온 편지가 그의 필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가 죽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가족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참전한 후 매일 밤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무사귀환을 염원하던 그의 아내 이종순(76) 씨도 “심하게 다치긴 했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했다”고 말한다.

처음 보름 동안은 수도육군병원에서 치료받다 경주18육군병원을 거쳐 부산5육군병원으로 옮긴 이 하사는 그곳에서 2년 뒤 제대했다. 다행히 그 사이 수차례의 수술 끝에 함몰됐던 얼굴에 살도 붙고 치아도 생겼지만 부상 후유증은 계속됐다. 전처럼 아무 음식이나 씹어 먹을 수도 없었고 말도 어눌해졌다. 시력도 손상돼 한때는 실명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포탄 파편에 맞아 찢어진 배의 상처가 문제였다. 이 부위는 여섯 차례의 수술로도 봉합되지 않았다. 처음에 부상 정도가 심각한 얼굴 치료에 집중하다 보니 찢어진 뱃살을 꿰매지 않고 두 달 동안 방치한 탓이다.

이인모 할아버지는 상의를 들어 상처를 보여줬다. 배 한가운데가 성인 남성의 주먹만한 크기로 움푹 패어 있었다. 그 부위는 두꺼운 살 대신 화상을 입은 피부처럼 얇은 표피로 싸여 있어 매우 아파 보였다.

할아버지는 “평소에는 아프다는 의식을 못하는데 힘든 일을 하면 위가 튀어나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그래도 다른 후유증은 많이 좋아졌다. 정부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우리나라 의술이 발달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제대 후에도 계속 수술과 치료를 받아 시력을 되찾고, 음식도 씹어 먹을 수 있게 됐어요. 얼굴도 완전하진 않지만 정상에 가까워졌고요. 제대 후 몇 년간은 몸이 불편해 농사일밖에 거들 수 없었지만 건강이 상당히 회복된 뒤에는 정부 도움으로 한국전력공사에서 일했어요.”

그는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한국전력공사에서 정년까지 26년간 근무한 것도, 슬하의 5남1녀를 모두 반듯하게 키워낸 것도 아내의 극진한 뒷바라지 덕이라고 했다. 또한 옆에서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아내에 대해 “아이들을 어떻게든 잘 키워보려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한 어머니상’을 비롯해 무수한 상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아내인 이종순 할머니는 “제대 후 남편 얼굴에서 고름이 줄줄 나오고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시어머니께서 합방을 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몰래몰래 아이를 갖다 보니 6남매를 낳았다”며 웃었다. 또한 “아이들을 힘겹게 키워서인지 다들 효성이 지극하다. 남편 건강이 다시 안 좋아져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데 어서 회복돼 같이 여행을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핏빛 전쟁으로 신혼의 단꿈이 산산조각난 이들 노부부는 “전쟁은 승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치유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글·김지영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서울보훈병원에 입원 중인 곽완(82) 할아버지는 “6·25전쟁이든 연평해전이든 전쟁은 양측 모두에 피해를 끼치는 백해무익한 것”이라며 “전쟁이라는 말만 들어도 징글징글하다”고 말했다. 1952년 그는 충남 금산에서 농사를 짓다 6·25전쟁에 징발됐다. 당시 그에겐 어여쁜 아내와 태어난 지 45일밖에 안 된 딸이 있었다.

“가족을 두고 떠나려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아내가 하도 예뻐서 누가 업어 가면 어쩌나 걱정이 되더라고. 딸아이 얼굴도 자꾸 눈에 밟히고. 그래도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장에 나갔어요.”

그의 소속은 9사단 29연대 1대대 3중대 화기분대였다고 한다. 화기분대는 기관총을 앞세우고 강원 철원군의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밤낮없이 싸웠다. 낮에는 우리 군이 백마고지를 차지하고, 밤에는 중공군이 차지하는 싸움이 수없이 반복됐다.

“백마고지 쪽에는 철원평야와 김화평야가 펼쳐져 있어 이 곡창지대를 빼앗기면 피해가 상당했어요. 그래서 백마고지는 더더욱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죠. 그렇게 1년 이상을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싸웠어요. 전우를 사귈 수도 없었어요. 전투에 임할 때마다 대부분이 죽거나 다쳐서 다신 볼 수 없었으니까요.”

30만 발의 포탄이 터진 백마고지 전투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용맹하게 싸운 그는 어느덧 이등병에서 분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보초를 서던 그의 머리 위로 포탄 파편이 떨어졌다. 즉시 후방으로 이송됐지만 상처가 깊어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결국 계속 병원 신세를 진 그는 제대 후 충남 금산의 아내와 딸 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에겐 가족 상봉의 기쁨을 만끽할 여유조차 없었다. 부상의 후유증과 가난이 또 다른 장벽처럼 그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훈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아 머리의 상처와 통증은 많이 사라졌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마땅한 돈벌이가 없었어요. 처음 얼마간은 농사를 짓다가 똥지게를 져서 먹고살았어요. 제대 후에 딸 둘과 아들 다섯을 더 낳았는데 아비 노릇을 하려면 뭐든 해야 했으니까요.”

곽완 할아버지는 지난 4월, 전투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 군인에게만 주는 화랑무공훈장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무공훈장은 벽걸이로 만들어 가보로 보관하려 맡겨뒀고, 지금은 함께 받은 시계밖에 없다”며 시계를 찬 손목을 내미는 할아버지의 두 볼이 사춘기 소년처럼 발갛게 상기됐다.

인터뷰를 마치며 할아버지는 “6·25전쟁 때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징발돼 많이 죽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지만 그런 악몽은 다시는 꾸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다”고도 했다. 바로 군번이었다. 할아버지는 백마고지에서 싸우던 20대로 돌아가 자신의 군번인 ‘0663412’를 힘차게 외쳤다.

글·김지영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서울보훈병원에는 8백40여 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다. 그중 80퍼센트 이상이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나이 들어서도 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그래서 장기 입원 환자가 상당수다.

이들의 간병은 가족이나 전문 간병인이 맡고 있지만 적십자 봉사단원과 자원봉사자들 또한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적십자 봉사단원들은 병원 내에 따로 도서관을 만들어 책을 대여해주거나 장기, 바둑을 둘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봉사단원들은 따뜻한 차를 대접하는가 하면 환자용 거즈를 소독하기 편하도록 포장하기도 한다. 21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한 적십자 봉사단원은 “책을 빌리러 오시던 6·25전쟁 참전 용사들이 많이 돌아가셨다”며 “지금도 하루 평균 1백20명에서 1백50명이 다녀가신다”고 전했다.

병원 내 사회사업실에 이름을 올리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이들도 2백60여 명이다. 구청회보에서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를 보거나 다른 자원봉사자의 소개로 찾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원봉사자들은 병원 안내데스크, 약국, 체육관, 무인수납기 등에서 근무하며 환자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때때로 이들은 웃음치료, 기공체조, 이·미용 봉사에도 나선다.

2004년 8월부터 자원봉사자로 활동해온 김덕자(58) 씨는 “아이들이 장성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우연히 반상회보에 실린 모집공고를 보고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 하루 3시간 정도 봉사하는데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김 씨는 또한 “환자들에게 드리는 것보다 얻어가는 것이 많다”며 “봉사활동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내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고 밝혔다.

글·김지영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 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해 일어났다. 북한은 그해 6월에 접어들면서부터 남침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 평화공세를 전개하는 한편 공격 부대를 전방으로 전진 배치하고 정찰 명령과 전투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군의 심상치 않은 동태에도 6월 24일 그동안 발령해온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에게 외박과 휴가를 줬다. 그 바람에 전선이 무방비 상태가 되자 북한이 기습적으로 도발한 것이다.

전 국토를 초토화한 이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여 만에 끝났지만 이후 한반도는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산가족이 됐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인구주택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에 이산가족이 있는 인구는 약 71만6천명으로 나타났다.

인명피해도 엄청났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6·25전쟁의 인명피해 현황은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 포로를 모두 합쳐 77만6천3백60명에 달한다. 이 중 62만1천4백79명은 한국인이다. 전사나 사망한 사람은 13만7천8백99명, 부상자는 45만7백42명에 이른다. 당시 남한 인구가 2천1백만명 정도였으니 그중 30퍼센트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셈이다.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1999년 6월 15일 벌어진 제1연평해전과 2002년 6월 29일에 일어난 제2연평해전은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지만 인명피해가 발생하긴 마찬가지였다. 제1연평해전은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한국 영해를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한국 해군 고속정이 선체를 충돌하는 방법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태였다. 이 해전으로 북한 해군 어뢰정 1척이 침몰하고 대형 경비정 선체가 대파했으며, 중형 경비정 2척과 소형 경비정 2척이 파손됐다. 반면 우리 해군은 초계함 1척의 기관실과 고속정 4척의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장병 9명이 경미한 부상을 당했다.

제2연평해전은 북한 경비정이 NLL을 넘어와 한국 경비정에 선제 기습 포격을 가하면서 시작됐다. 북한의 갑작스런 공격으로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지만 인근 해역에 있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이 합류하면서 교전은 25분 만에 끝났다. 이 해전으로 북한 해군의 대형 경비정 1척이 대파했으며 우리 해군의 고속정 1척이 침몰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해군 6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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