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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090411호

약소국의 설움 딛고 이젠 세계화 자부심


애국적 감정, 즉 나라를 사랑하는 감정은 어떻게 생겨나고, 그 주된 속성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당연히 근대적 국가의 발생부터 살펴봐야 한다. 서구의 정치학자들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을 근대적인 국제관계와 주권국가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 30년전쟁을 종식시킨 이 조약 이후 정치적 의미에서의 안보(Security) 개념이 싹트게 되었다.
지역적으로 제한된 국가는 소속원, 즉 시민들에게 내적인 안전(경제적, 사회적 안전)과 외적인 안전(외교와 군사적 힘)을 제공해 그들에게서 신뢰와 충성을 이끌어낸다. 그 반대급부로 시민들은 위험에 빠진 국가의 안보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이고, 세금 징수를 용인하는 감정적인 연대를 발전시킨다. 나라사랑은 이처럼 내외적인 안전을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애착적인 감정이다.

감정의 차원에서 보면, 국가의 제도들은 법적인 것에서 감정적인 것으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에 대한 감정적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국가는 먼저 다른 종류의 정체성, 예를 들어 다른 국가의 정체성과 이를 지지하는 제도들과 경쟁해 우월성을 확보해야 한다. 충성스러운 구성원이 없이는, 즉 국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시민이 없이는 국제관계와 경쟁에서 큰 약점을 갖게 된다. 요컨대 나라사랑 정신은 다른 국가와의 관계 맺음과 경쟁에서 매우 중요한 경쟁력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한다. 특히 타국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는 더하다. 나라사랑의 감정을 동원(Mobilization)할 수 있는 방법에는 크게 두 경로가 있다. 하향식 경로, 즉 명령에 따라 나라사랑을 끌어내는 방법과 시민들의 애착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상향식 경로가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하향식 방법은 대부분의 독재국가나 권위적 국가에서, 상향식 방식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용된다. 하향식 방법의 가장 큰 문제는 나라를 정부 혹은 정권과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정권보다 나라의 수명이 길다는 사실, 즉 정권이 바뀌어도 나라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마치 특정 집단만이 나라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질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나라와 정권은 동일한 것이 된다.

한국 사회의 나라사랑 방식은 하향식에서 상향식으로 변화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굳이 시기를 구분한다면 1987년 민주화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민주화 이전에는 정권이 동원 혹은 조작한 애국주의가 강조됐다. 훈육과 계몽, 선전 선동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함으로써 자신들의 집권을 고착하는 여러 방법이 조직적으로 실시됐다. 모든 교육과정에서 정권유지와 결부된 애국은 핵심적 요소였다. 의례도 실시됐다. 학교에서는 ‘애국조회,’ 거리에서는 ‘국기 하강식,’ 집회에서는 ‘국민의례’가 당연시됐다. 이 의례는 통상 나라와 최고 통치자를 같은 반열에 두었다. 




민주화는 국가, 정확히 말해서 정권과 국가의 연결을 끊었다. 또한 애국의 하향식 방법은 퇴조하고 시민들의 자발성이 강조됐다. 정권이 길러주던 애국심은 이제 새로운 경쟁자들과 만난다. 이제 개인들의 정체성의 근거인 국가는 다른 것과 경쟁해야 한다. 전통적인 정체성 범주인 계층, 젠더(性·Gender), 지역, 하위문화, 특히 타 국민의 그 나라에 대한 법적, 문화적 소속감 등은 정체성의 시장에서 국가 소속의식과 경쟁을 벌인다. 세계화가 진전되고 국제화가 강화되면서 이런 경쟁은 새로운 국면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은 나라사랑의 세대별 차이를 강화한다. 장년층과 노년층의 경우 한국에 대한 소속의식과 애착이 이후 세대, 특히 청소년 세대와는 많이 다르다. 이들은 약한 국가의 ‘설움’을 피부로 절감했기에 강력한 국가의 힘, 즉 국력을 강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세계화와 국제화의 물결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이미 사회적 참여와 활동에서 한 발 뺀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이들 세대는 새로운 정체성의 근거들과 맞닥뜨릴 수 있는 가능성이 적었기에 정체성의 경쟁 및 혼란의 정도가 약하다. 이들에게서 배타적 애국주의가 번성하는 것은 이런 환경의 산물이다.

성장 세대의 상황은 다르다. 이들은 말 그대로 정체성 시장에 내던져졌다. 과거에 비해 전통적인 규범이나 가치관은 이들에게 그다지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세계화된 청소년 문화는 이들의 생활을 이전 세대와 다르게 구조화한다. 국제적 능력, 이를테면 언어능력과 타문화 이해능력은 학교 교과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됐다.

그것은 개인들의 취업 가능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국제 교류에 대한 참여 역시 매우 높아졌다. 국제성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그 결과 타 문화에 대한 이해 정도는 매우 높아져 배타적 애국주의의 위험도는 낮아졌다. 하지만 나라사랑의 정도도 낮아졌다.




요컨대 오늘날 성장 세대는 역설적 상황에서 자란다. 세계화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해야 하고, 동시에 국가에 대한 애착도 키워가야 한다. 그럼에도 성인들은 이들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성인들은 이들을 정서적으로 지원하고 칭찬하기보다 실망하고 꾸중하는 게 더 편하다. “생존을 위해 국제화가 돼야 한다”고 말하면서 국제적이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실망하면서도 “나라사랑이 약하다”고 꾸중한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처한 역설적 상황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이 없다. 아마도 중용과 균형 맞추기가 유일한 답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성인들은 그들이 처한 모순적 상황에 대한 공감과 책임의식도 없이 실망과 꾸중이라는 편리한 해결책을 선호한다. 결국 이런 태도는 문제 해결보다 세대 간의 차이와 긴장을 더욱 높일 뿐이다.  

글·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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