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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이웃을 향해 열려 있는 가족이 행복하다




프랑크 쉬르마허가 쓴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장혜경 옮김, 나무생각)를 펼치면 흥미로운 사례가 눈길을 끈다. 독일의 유명 휴양지에서 누전사고로 3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함께 여행 온 가족들 중엔 사상자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타다 남은 CCTV를 판독해본 결과 이 수수께끼를 풀어줄 장면이 포착되었다. 휴양지 피서객들은 한창 재미있게 즐길 때는 낯모르는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하지만 경계경보음이 울리자 함께 놀던 이들의 손을 놓고 황급히 누군가를 찾아나서는 장면이 곳곳에서 잡혔다. 그들이 황급히 찾아나선 그 누군가는 바로 ‘가족’이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약자를 향한 이타적 돌봄과 배려, 헌신적 희생과 조건 없는 양보야말로 가족이 구현하는 공동체적 가치의 핵심임을 지목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금(換金)이 불가능한 이런 가치의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 일견 역설적이지만, 공동체적 가치를 빠르게 상실해가는 사회일수록 미래 또한 암울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5월, 어린이날을 필두로 어버이날을 거쳐 부부의 날이 연이어 기다리는 가족의 달이다. 가족만큼 신비화(Mystified)된 사회제도도 찾아보기 어려우리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가족은 도덕적·윤리적 행위양식의 저장고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가족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정한 인식을 견지하는 것을 봉쇄해왔다. 더불어 가족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보다 무엇을 말해선 안되는지의 규범과 룰이 더 정교하게 발달했다.

누가 가족의 범주에 포함되는지 가족의 경계를 문화권별로 비교한 결과 동남아시아에선 혈연을 나누지 않은 배우자는 가족에 포함시키지 않음이 밝혀졌다. 가족의 친소(親疎)관계도 문화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한국과 인도에선 엄마와 아들이 가장 가깝고 부부가 가장 소원한 반면, 서구에선 부부가 가장 친밀하고 남자 형제 간의 거리감이 가장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가족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이웃을 향해 열린 가족이 되어야 한다. 내 아이만 챙기는 ‘가족 이기주의’나 남편과 자식의 성공에 집착하는 ‘가족 공리주의’의 벽에 갇혀 있는 한 우리네 가족은 요새가족(Fortress Family)에 머무를 수 있다.

겉으론 견고한 성곽으로 무장했으나 정작 가족 간에는 소통이 단절되어 심리적으로 소외된 ‘빈 껍데기 가족’으로 남을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다.


서울 근교 아파트 단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곳에는 한 독지가가 사재(私財)를 털어 운영하는 주부대학이 있었다. 초창기엔 학생을 모집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학생들 또한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아 운영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졸업생을 내게 되고, 주부대학도 모범적으로 운영해 그곳은 ‘살기 좋은 곳’이 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데 이곳 주부들이 변화를 경험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인근의 지적 장애아 수용시설에서 자원봉사를 경험한 뒤부터였다. 주부대학의 마지막 프로그램인 자원봉사 과정에서 주부들 대부분이 ‘가족이기주의’가 자신의 가족들을 불행하게 함을 절감한 것이다.

이웃 집 아이들보다 공부 못하는 자식이 밉고, 변변히 출세 못하는 남편이 원망스럽던 주부들. 이젠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남편의 출세보다 가족의 만족스러운 삶이 소중한 가치임을 발견하면서, 아들딸 그리고 남편에게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주부로 거듭나게 되었다.

감사할 것이 많음에도 감사할 줄 몰랐던 주부의 이기심이, 소외된 이웃을 향한 애정과 자신의 공동체를 향한 관심으로 승화되면서 이루어진 해피엔딩인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고령사회를 대비하여 우리식 가족공동체 모델의 장점에 서구식 복지모델의 강점을 결합한 새로운 노후 공동체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서구의 실버타운이 일부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되어줄 것이다. 실버타운은 대부분 도심에서 떨어진 공기 좋고 물 좋고 땅값 싼 곳에 세우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과 친지의 방문에 어려움이 따르고, ‘머지않아 죽게 될 노인들’만 함께 지내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삶의 만족도와 활력이 급격히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어린이집 가까이 실버타운을 짓는 세대통합적 시도가 환영받고 있고, 일본에서는 도심에 주거단지를 조성할 때 노인을 위한 의료시설은 물론 무장애(無障碍) 기술을 도입한 노인 부양공간을 할당하는 안이 현실화되고 있다.

우리도 다양한 지각변동과 세포분열을 거듭해가고 있는 가족환경의 변화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친정(처가)을 중심으로 양육과 부양이 이루어지는 신모거제 가족과 1인 가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현실을 반영해 부계 중심 가부장제 가족 가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양계제적 친족문화를 구축해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 혈연가족 중심적 사고를 뛰어넘어 유사 가족공동체의 연계망을 확대하는 방안 또한 고려해봄 직하다.

가족이란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공동체는 아니다. 관계성의 욕구를 충족하면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고안된 제도인 만큼, 역사적 상황과 문화적 요건에 따라 다양한 답을 여러 갈래로 추구해온 것이 가족의 본 모습일 게다.

그런 만큼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끼리 자신의 방식만 정답이라 고집하기보다 서로의 다름에 적응해가고(化) 애정과 친밀감을 나누며(和) 갈등을 현명하게 극복하여 화(禍)를 피해 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글ㆍ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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