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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그날 그곳에서 본 사건을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쓰러져간 우리 형제, 이웃의 죽음이 헛되고 헛된 일이 되어버렸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다 눈물도 말라버렸다. 수 백명 무고한 시민들이 군인의 총칼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지만 그날의 아픔을 말해주는 것은 고작 몇 장의 사진과 무성한 소문뿐. 타임머신이라도 있으면 사람들을 태우고 1980년 5월의 광주로 떠나고 싶다. 그래서 영화 ‘화려한 휴가’가 반갑다. 그동안 가슴 한 편에 묻혀 있던 아픈 역사를 우리 모두 앞에 꺼내 주어서다.

아직도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없는 비극, 광주 민주화운동. 그 진실이 영상으로 대중들을 찾아오기까지 꼭 2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개봉 20일 만에 5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본 ‘화려한 휴가’는 영화적으로 이렇다 저렇다를 논하기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핵심이었던 열흘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해석하고 바라보았다는 데서 큰 의미를 갖는 것임에 틀림없다.


5·18을 정면으로 다룬 첫 작품
‘그날의 광주’를 처음 돌아본 건 충무로가 아니라 독립영화인들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9년이 지난 1989년,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 소속인 이은, 장윤현 감독이 ‘오! 꿈의 나라’를 내놨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무력으로 진압된 이후 계엄당국의 수사를 피해 경기도 동두천의 선배를 찾은 대학생의 고통을 그린 이야기다. ‘두 번째 광주영화’이자 제도권 극장에서 상영된 첫 영화로는 90년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다. 서슬 퍼런 군부에 의해 28분 13초가 뭉텅 잘려나간 채 극장에 걸린 비운의 영화였다.

이후 94년 최윤의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를 장선우 감독이 영화화한 ‘꽃잎’. 1980년 5월 군인들의 총칼에 죽어가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광주를 탈출한 어느 소녀의 슬픔과 한을 통해 5·18을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1995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TV 드라마 ‘모래시계’도 5·18 전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했다. 여대생으로 시대의 아픔을 나누다 갖은 고초를 겪는 윤혜린(고현정 분),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시대적 아픔을 방관하는 대학생에서 계엄군으로  변신해 광주 시민을 진압할 때 죄책감을 느끼는 강우석(박상원 분) 등 시민이 아닌 대학생들의 삶을 그린 드라마로 TV에서 처음 5·18의 아픔을 다루었다.

또 1999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5·18이 남자주인공의 인생을 뒤집어 버린다. 극중 1980년 5월 영호(설경구 분)는 전방부대에 입소한 신병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수부대원으로 광주에 투입되어 시민들에게 M16 총을 발사한다. 그런 끔찍했던 자신의 과거 삶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후회로 결국 그의 인생은 파멸하는 과정을 통해 5·18이 우리 모두에게 남긴 상처를 이야기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단편적이고 상징적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의 아픔과 고통을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사랑과 희망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흘
영화 ‘화려한 휴가’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5월 18일 0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평범한 시민들이 광주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계엄군과 맞서는 열흘간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사실적이며 감동적으로 그렸다. 어떻게 그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갔는지, 왜 그들이 총을 들고 계엄군과 맞설 수밖에 없었는지 이웃집 형과 누이 같은 사람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래서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의 분노와 고통, 슬픔이 더욱 커진다. 과연 ‘누가 그들을 쏘라고 했을까’하는 물음은 영화가 끝나고도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27년 동안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 ‘화려한 휴가’. 다시는 이 땅에서 같은 아픔을 되풀이 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겨주며 민족의 화해에 새로운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한준규 기자
 


‘화려한 휴가’의 김지훈 감독


민족 화합의 시작은 ‘역사 바로 세우기’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용서하는 자와 용서 받아야 할 자가 화합해야 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입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김지훈(36)감독은 말들은 많지만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 묻혀가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전라남도 광주라는 한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란 말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기초가 됐던 2만 장 정도의 증언록부터 샅샅이 훑어가며 대본을 만들었다.
‘역사의 출발은 공간의 재현’이라는 그의 신념답게 30억 원이 넘는 돈으로 80년대 광주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세트장을 지었다. 간판과 나무 등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되살렸다.
그는 “민족의 화합과 상생은 정확한 과거의 과오 정리를 통해 국민적인 합의를 이루어야 가능하다”면서 “나의 영화가 이런 발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K에게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고 있는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어느덧 남부 지방으로 내려와 제주에도 기습성 폭우를 쏟아붓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혜의 자연 경관으로 이루어져 있는 제주의 온갖 풍광들에 흠뻑 취해있습니다. 그런데 저 많은 관광객들 속에서 제주의 참담한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제 고향 제주를 찾는 그들을 볼 때마다 종종 이런 물음을 던져보곤 합니다.

K는 제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쉽사리 짐작할 겁니다. 또 제주의 4·3항쟁을 환기시킨다고 짜증을 부리는 것은 아니겠죠? 언젠가 K가 저를 찾아 제주에 왔을 때, 저는 K를 현무암에 부딪쳐 부서지는 바다의 포말을 만끽할 수 있는 해변과 한라산의 중산간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은 기생 화산인 오름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억새가 제주의 해풍에 넘실대는 풍경을 보면서, K는 감탄사를 내질렀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저도 그런 줄로만 안 적이 있었습니다. 제 고향 제주를 빼어난 관광지 중 하나로만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문학 작품을 접하면서부터 이러한 제 통념은 단박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았던 제주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전대미문의 역사적 참상을 겪었던 곳이고, 그 역사적 고통의 상처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제 부모님 세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까지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억울한 죽음과 살아 있는 자들의 맺힌 원한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시절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면, 엄혹한 국가권력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 또 다시 이념적 폭력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제주의 4·3은 그 진실을 해명하려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철저히 봉쇄하는 ‘역사적 금기’였습니다. 이 금기를 깨뜨린 게 바로 현기영의 단편 ‘순이삼촌’(1978)이었습니다.






역사와 개인 곱씹어 보게 한 ‘광장’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제주의 4·3을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내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침묵과 폭압 속에서 은폐되고 왜곡되었던 그 역사적 진실의 문턱을 넘어서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분노하고 전율하였습니다.

관광지로만 알고 있던 제주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국가권력의 끔찍한 폭력 행위가 저질러진 곳이었으며, 그 폭력 속에서 제주의 무고한 민중들이 ‘공산폭도’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념적 굴레를 쓴 채 4·3의 역사적 진실이 크게 훼손된 데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4·3으로 인해 제주의 공동체가 무참히 붕괴된 데 대해 전율하였습니다.

사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러한 역할을 한 게 어디 현기영의 ‘순이삼촌’뿐이겠습니까. K는 제가 ‘순이삼촌’을 얘기할 때면, 최인훈의 ‘광장’(1960)부터 얘기를 꺼냈었죠. 기왕 생각이 난 터에 이 작품이 단행본으로 발간되면서 작가가 언급한 부분을 들춰볼까요.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 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산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 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최인훈,·‘광장’ 1961년판 서문·중에서)

‘광장’과 4·19혁명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4·19혁명이야말로 한국전쟁으로 인한 1950년대 전후의 역사와 단절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열망의 불꽃을 점화시키는 역사의 분수령이었습니다.

민족 분단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체된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의 행보를 가속화시키기 위한 게 바로 4·19혁명의 역사적 성격이었으니까요. 최인훈의 ‘광장’은 그 당시 팽배해진 사회의 이러한 역사적 진보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을 오가며, 어떻게 사는 게 진정한 민주주의적 삶이며, 개인의 행복의 가치를 보증해줄 수 있는지를. 이명준의 고뇌는 끝내 남과 북 중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고 제3국행을 선택하여 깊은 바닷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비록 이 작품이 1960년에 쓰여졌으나, 아직도 분단체제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명준의 저 도도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장’을 읽으면서, 광장과 밀실이 비유하는, 예컨대 역사와 개인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객지’·‘난쏘공’은 노동운동의 노둣돌
K씨, 돌이켜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결코 소홀히 간주할 수 없네요. 문학에 조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문학이 역사를 선취(先取)한다”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문학은 도래할 역사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일종의 예지적 능력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가령, 1970년대의 대표적 두 문제작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황석영의 ‘객지’(1971)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6)은 모두 1970년대의 산업화 시대로 인한 노동자가 겪는 온갖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증언하여 산업화 시대가 초래한, 그리고 본격적으로 가시화될 공장 노동자의 운명을 예지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으로 인해 한국의 노동 현실이 극명하게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정부의 철저한 언론탄압과 노동탄압으로 인해 한국의 노동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사회 저변에 확산되지 못했음을 고려해보건대, ‘객지’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노동자의 피폐한 노동의 현실을 사회가 외면해서는 안 되며, 노동 현장의 모순을 극복하는 게 노동자의 복지만을 위하는 게 아니라 산업화 시대로 야기된 사회의 온갖 병폐와 모순을 극복하여, 민주주의적 가치를 드높이는 역사의 진보라는 데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큰 몫을 다 하였습니다. 이들 두 작품은 이후 1980년대 저 숱한 노동운동과 노동문학의 노둣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결코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짓눌린 시대의 정의와 진실 인식케 한 ‘푸른 혼’
여기서, 한국 민주주의 가치를 복원하고자 한 또 다른 중요한 문제작들의 목록이 생각나는군요. K씨, 기억나세요. 새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보신각 타종 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은 한국사회가 너무 손쉽게 지나간 역사를 망각의 뒤안길로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씁쓸한 심정을 털어놓은 적이 있죠. 특히 80년대의 역사를 일부러 망각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K와 저는 홍희담의 ‘깃발’(1988)을 떠올렸습니다. 80년 광주의 비극을 다룬 본격적 작품이 없던 터에, 80년 광주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도청 사수를 위한 그 뜨거운 현장을 다룬 ‘깃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너무나 빨리 광주민주화 항쟁의 가치를 가볍게 인식하고 역사의 한갓 기념비로만 자족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적 성찰을 했습니다.

K씨, 우리가 어떻게 지켜내고 얻어낸, 소중한 민주주의적 가치입니까. 분단체제를 살면서 분단의 이념적 억압 아래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사회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1983~89)을 통해 이념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놓여나, 분단체제에 대한 넓고 깊은 인식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분단의 문제를 구체적인 일상의 실감으로 포착하는 현실주의적 시각은 이념적 질곡 속에서 훼손된 민족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 진실의 정당성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원일의 연작소설집 ‘푸른 혼’(2005)을 통해 우리는 엄혹한 유신체제 아래 그동안 간첩 혐의로 날조된 ‘인혁당사건’에 짓눌린 시대의 정의와 진실, 그리고 인권의 문제를 올곧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맹목적 반공주의와 냉전시대의 폭압 속에서 그 진실이 은폐되어 있던 ‘인혁당사건’의 면모를 역사의 현장 속에서 탐구해내고 있는 것은 한국문학의 역사적 응전의 가치를 보증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K씨, ‘지금, 이곳’ 한국사회는 매우 중요한 역사의 국면에 놓여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소설의 주요 문제작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어디에선가 씌어지고 있는 한국소설이 도래할 우리 역사의 진보에 동참하고 있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한국소설은 그 역사의 운명을 피해가지 않으니까요.

 

 


과거사 정리 승계와 확대

국민의 정부에서 진행된 ‘제주 4·3사건’과 ‘의문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은 참여정부에서 승계해서 마무리됐다. 이와 동시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오랫동안 과제로 지적돼 온 사안들에 대해 과거사 정리작업을 새롭게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한국전쟁 시기, 민주화 시기 등 지난 세월 탄압 속에 드러나지 않던 온갖 문제들이 제기됨에 따라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위원회 설립이 줄을 이었다. 과거사를 다루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우리 현대사의 뒤안길에 수많은 사람들의 한과 희생이 존재함을 실감해야 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2003년 10월 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하고 4·3 당시 군과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들의 희생에 대해 정부차원에서 사과할 것 등 7개 항의 건의안을 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31일 제주도를 방문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공식 사과했으며 2006년 4·3위령제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공식 사과는 그동안 쌓여왔던 제주도민의 고통과 한을 풀고 화해와 용서로 가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3년 7월 출범해 1년 동안 조사를 거쳐 11개 사건을 위법한 공권력이 개입한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의문사 사건으로 인정했다. 이후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의문사 사건들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 이관하여 진상규명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2000년 8월 출범, 2006년 법 개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시기를 1964년 3월24일 이후로 확정하고 관련자 심사, 결정과 지원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강점기까지 과거사 정리의 대상이 크게 확대됐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과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의 제·개정을 통해 과거 식민지시대를 청산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만주사변 이후 일제에 강제동원된 군인, 군속, 노무자, 위안부의 실상에 대한 진상조사와 유해 발굴 및 수습, 희생자 및 유족의 심사 등의 활동을 진행 중이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2004년 9월 발족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을 심의 결정하고 기념관과 기념탑 건립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위원회
2004년 8월 발족해 218명의 희생자를 결정하고 의료지원금 지급, 역사공원 조성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삼청교육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2004년 8월 발족해 삼청교육 피해자 중 사망, 행방불명, 상이자를 심사 확정하고 보상금 및 의료지원금을 지급하며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를 시행 중이다. 삼청교육대 강제동원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후 발족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맡고 있다.






포괄적 과거사 정리 시도

200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포괄적인 과거청산 작업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한계를 드러낸 개별 사안, 사건별 정리가 아니라 포괄적 정리라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었다.

기존 과거사 정리방식은 개별 사안 또는 사건별로 피해자나 사회단체들이 과거사 정리를 요청하면 이를 받아들여 각 사건별로 특별법을 만들고 진상규명위원회를 설립하여 처리하는 형식이었다.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법을 만들어야 하니 비효율적이고 구조적인 원인규명과 재발방지에도 한계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지난 역사에서 쟁점이 됐던 사안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제안하고 과거 인권침해 의혹을 받아온 국가기관도 스스로 나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편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에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과거사 정리의 틀을 제시한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5년 5월 법제정에 이어 12월  출범했다. ‘항일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이후 국력을 신장시킨 해외동포사, 광복이후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은폐된 진실을 밝혀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국민통합에 기여하기 위한’ 기구의 등장으로 포괄적 과거사 정리가 가능해졌다.
국정원, 경찰청, 국방부도 2004년 민간 참여하에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를 각각 설치하고 자체 진상규명에 착수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2006년 8월 활동을 시작해 친일행위로 취득하거나 그 후손이 상속, 증여받은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는 길이 열렸다.

시효배제와 재심문제 등 제도보완

 과거사 정리 과정에서 공소시효와 재심문제가 제기됐다. 국가 권력기관의 인권침해에 대해 공소시효가 지났다거나, 또는 이미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었고 재심사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되는 사례가 줄을 이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8·15 경축사에서 피해자들의 구제에 걸림돌이 되어온 공소시효 및 재심요건의 문제를 지적했고 과거사 청산작업을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과제를 제기했다.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들의 보상과 배상에 대해서는 민·형사 시효의 적용을 배제하거나 적절하게 조정하는 법률’도 필요하면 만들 수 있고 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난 과거사 관련사건에 대해서도 ‘융통성 있는 재심이 가능하도록 해서 억울한 피해자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었다.
시효배제가 ‘가해자 처벌을 위한 것’이라는 반발과 법적 안정성을 해친다는 반론이 제기되는 등 논쟁이 벌어졌다.

정부는 ‘처벌’이 아니라 ‘피해자 구제’가 초점이라는 것을 알리고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있으나 국회 등에서 본격 논의되지는 못하고 있다.
정부가 문제점을 제기하고 사회적 논쟁이 활성화되자 법원이 전향적인 판결을 내려 관심을 끌었다.

서울고등법원은 2006년 2월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사망한 서울대 최종길 교수에 대한 국가배상소송에서 유족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발표 때까지 진상을 알 수 없었으므로 국가가 소멸시효를 이유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어긋난다며 유족에게 18억4800만 원을 배상하라고 1심 판결을 뒤집었다.
법원은 또 2005년 12월 인혁당 사건(1975년)의 재심을 결정하고 재심재판을 통해 피고인들의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김병훈 기자
 




전직 대통령 처벌·군사독재시절 의문사 진상규명


[SET_IMAGE]4,original,right[/SET_IMAGE]역대 정부의 과거사 정리
1995년 7월 검찰이 12·12 및 5·18 내란 관계자들을 불기소 처분하자 수십만 명이 연대 서명하여 국회에 특별입법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11월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11월 30일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를 발족시켰다. 국회가 12월 21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검찰이 곧바로 재수사에 착수하여 핵심인사 16명을 군사반란·내란죄로 기소했다.

1심 재판부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16명의 피고인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했다는 점에서 중요 전환점이 됐지만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1990년 제정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1997, 1999년 개정되면서5·18 민주항쟁의 희생자들이 경제적인 배상 및 보상을 받게 됐다.

1960년 부분적인 진상조사에 그쳤던 거창양민학살사건 관련자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1987년 6월항쟁 후 유가족들의 전면적인 진상조사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에 따라 1996년 1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됐다. 이후 추모공원이 건립되는 등 국민화합과 민주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서 과거사 정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제주도 4·3사건과 군사독재시절 발생한 의문사의 진상규명 활동이 진행되고 민주화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보상도 시작됐다.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과거사 정리는 진상규명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자 유족들과 사회운동단체들은 4·3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전개했고 그 결과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어 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기획단이 발족해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외국과 국방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기무사령부, 경찰청, 정부기록보존소, 국사편찬위원회 등을 대상으로 조사활동을 벌이고 기록 등을 수집해 자료집을 발간했다.

군사독재시절 수많은 의문사사건이 발생했다. 유가족들은 1998년 11월부터 422일 동안이나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며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마침내 1999년 12월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립됐다. 약 3년 동안 활동하면서 80여 건의 의문사 사건을 조사, 19건을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발생한 의문의 죽음으로 인정하고 33건은 기각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10월 대통령에게 의문사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한 51개 항의 권고항을 제출했다.

 


지난 8월 7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김종근(85) 옹은 자신이 ‘일제 강제동원 기록 전시회’(8·7~19)에 기증한 사진을 보며 다시 한 번 회한에 잠겼다. 1942년 12월 강제 징용돼 평양훈련소에서 입소환영식을 받는 장면이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는 광복절을 맞아 끌려간 삶, 조각난 기억들을 한 군데 모았다.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고 강제동원 피해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다.


민족정기 바로 세운다
올해로 한국사회는 광복 62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아직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청산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나치가 항복하자마자 청산작업을 벌인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제헌의회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만들어 일제 청산에 나섰지만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와해됐다. 60년이 지난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와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이하 재산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2006년 12월 6일. 지우고 싶지만,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 발표됐다. 정부는 이완용 등 러·일 전쟁부터 3·1운동까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초기 일제에 적극 협력한 106명을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한 것이다.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정부 차원에서 조사·결정해 발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반민규명위는 지난 6월 15일 2007년도 친일반민족행위 제3차 조사 대상자 11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이들은 1919∼1937년에 주도적으로 활동한 이들이다.

재산조사위원회도 지난 5월 2일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 후손 재산 63억 원 상당을 환수해 국고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반민족 행위로부터 기산하면 100년이 넘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이들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제대로 규명하고, 이들의 재산을 국가가 환수하는 것은 역사의 정의를 바로잡고, 현대에 교훈을 남긴다는 차원에서 의미 있다.

“…우리들을 강제로 이곳으로 끌고 와서 부려먹다가 종전이 되니 자기들 국민만 귀국시키고 우리들의 귀국문제는 간과하고 있는 일본정부의 처사에 대하여 나는 적개심을 금치 못합니다….”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한 피해자가 눈물로 쓴 편지다. 일제강점기 사할린 지역에 노동자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은 2만5000여 명. 진상규명위는 최근 사할린에 노동자로 끌려갔던 한국인들이 한국의 가족에게 보낸 1400여 통의 편지를 확보했다. 이 편지들은 태평양전쟁 뒤 한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현지에 남게 된 한국인 피해자들이 쓴 것들이다. 진상규명위는 이 편지들을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 규명 작업에 활용할 계획이다.









역사의 진실을 전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일제 강점기 또는 그 직전의 항일독립운동과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나라의 주권을 지키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해외동포사 등에 대해 진실 규명에 나섰다. 실례로 진실화해위는 지난 5월 15일 전체위원회를 열어 ‘정상윤의 신간회 평북 철산지회 사건’과 ‘박창래의 여수수산학교 학생독립운동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계열 인물이다. 좌익활동가들에게 항일운동 공적을 인정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부에선 ‘정부가 포퓰리즘적으로 과거사를 악용하고 있다’며 폄하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바로잡기의 취지는 우리 사회가 분열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 잘못을 바로 고치고, 참된 화합으로 가자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대는 우리 민족사의 최대 아픔이었다.

아직까지 종군위안부 등 상처는 깊게 남아있다.  게다가 광복된 직후 좌우 이념대립으로 민족적 자존을 세우는 과제가 유실되었다. 부끄러운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근원적 배경이기도 하다.

다행히 최근 식민지체제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 냉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에 발맞춰 일제잔재청산은 민족 통합과 민족사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한다. 친일반민족행위를 증언해줄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기도 하지만, 한국사회가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변해가고 있어 더 지체하다가는 민족 개념에 근거해 과거사 청산 작업을 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늦었지만 어두웠던 20세기 역사의 잔재를 정리하고 나아가 미래 세대들에게 민족사적 교훈을 줌으로써 21세기의 민족사를 밝게 해주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권영일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수요 집회


“피해자가  당당하게 싸워야 승리”




“미 하원 결의안 채택은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일본이 우리에게 직접 사과하고 배상하기 전엔 이 가슴에 맺힌 한이 안 풀려요.”
지난 1992년부터 빠짐없이 수요 집회에 참가해온 ‘위안부’ 길원옥(80) 할머니의 절규다. 아침부터 쏟아지던 비도 멈춘 지난 8일 정오 수송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세계공동행동주간 선포식 겸 773차 정기 수요집회에서 길 할머니는 일본에 사과와 보상을 거듭 촉구했다.

“이 나이에 돈 받아봤자 쓸 데도 없어요. 그렇지만 반드시 보상을 받아낼 겁니다. 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도 일본이 우리 후손들에게 잘못해놓고도 모른 척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또 과거사 피해자들이 누군가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길 바라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른 과거사 피해자들도 우리처럼 나서야 합니다. 그분들도 부모나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살았어도 사람다운 삶을 못 산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정신 차리고 나와서 끝까지 싸워야 됩니다.”

이 날 집회에는 길원옥 할머니 외에 이순덕(90), 이막달(85) 할머니도 함께 참여했다.
한국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모두 209명. 이 중 80여 명이 사망했는데 올 한 해만도 일곱 분이 돌아가셨다. 할머니들은 싸움이 끝나기 전에 자신들이 모두 사라져도 후손들이 일본의 만행을 기억할 수 있도록 박물관도 지을 예정이다       

이선민 기자 

 

           


“62주년을 맞는 광복절을 맞아 친일 매국자들의 재산을 환수한다는 소식은 더운 여름날 시원한 청량제 같은 시원함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이번 활동은 역사적 정의를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김현태 과거청산범국민위원회 사무차장은 친일의 대가로 취득한 친일재산이 국가에 귀속됐다는 소식에 반가워했다.

조 사무총장은 “매국의 대가로 축적한 엄청난 재산에 비해 턱없는 규모이지만 무엇보다 이번 결정이 가지는 역사적 상징성을 높이 평가한다”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민족정기를 일으켜 세우는 받침돌을 놓았으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 62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 잔재세력 손에 무너진 지 58년 만에 친일파 심판의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재산조사위)는 8월 13일 오전 한일합병의 공으로 귀족작위를 받은 민영휘, 민병석, 민상호, 박중양, 윤덕영, 이근상, 이근호, 이재곤, 임선준, 한창수 등 10명의 재산 257억 원을 국가로 귀속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반민족행위자 단죄 구체적 성과 나타나
지난 5월 이완용 등 친일파 재산 1차 국가귀속결정에 이어 두 번째다. 재산조사위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위원 9명 전원의 찬성으로 민영휘 등 10명의 토지 총 156필지, 102만60㎡(약 31만 평), 시가 257억 원(공시지가 105억 원) 상당의 친일재산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의결했다.

시가 기준으로 가장 많은 재산이 국가 귀속된 친일반민족 행위자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상호로 110억128만 원 상당의 토지 10필지, 43만1251㎡를 환수당했다.
민영휘가 시가 56억8756만 원 상당의 토지(31만7632㎡)를 환수당해 2위에 올랐고 이재곤 43억577만 원(16만9794㎡), 박중양 36억7110만 원(8만2082㎡) 등이 뒤를 이었다.







귀속재산은 독립유공자·유족 등 지원

특히 윤덕영과 민영휘는 생존시는 물론 후손들까지 부와 명예를 누린 것으로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재산조사위가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1930~40년대 윤덕영의 연소득은 약 11만 원으로 현시가 17억 원에 이르러 경성 자산가 중 소득 서열 11위였다.

윤덕영도 그러나 민영휘의 자식들에 비하면 ‘작은 부자’였다.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과 민규식은 각각 연소득 24만 원과 14만 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38년 ‘삼천리’라는 잡지는 민영휘에 대해 “조선에서 고금 몇 백 년 내에 처음 보는 큰 부자”라고 기술돼 있고, 한 때 재산 규모가 4000만 원(현 시가 약 8000억 원)까지 불어났던 것으로 전해져 온다. ‘삼천리’에는 민영휘의 토지에 대해 "평안도를 비롯해 조선 각 도에 없는 곳이 없으며 오직 함경도가 빠졌을 뿐이라고 기술돼 있다. 이번에 국가귀속이 결정된 민영휘 후손 명의의 토지는 청주 상당산성 일부를 포함해 31만7632㎡, 시가 57억 원 상당의 토지이다. 민영휘는 대부분의 토지를 민대식 등 자식의 명의로 했기 때문에 이것까지 합하면 약 7600만여㎡에 달해 최고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1차에 귀속결정까지 합하면 총 310필지, 127만4965㎡, 시가 320억 원(공시지가 142억 원) 상당의 친일재산이 국가로 귀속됐다.

재산조사위원회는 현재 109명의 친일파 재산 979억 원 상당의 토지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으며, 이들 토지에 대해서는 후손들이 임의로 처분할 수 없도록 법원에 보전 처분을 마친 상태이다.

장완익 사무처장은 “우리에게 부여된 친일재산 국가귀속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깊게 인식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더욱 노력하겠다”면서 “앞으로 조선총독부 중의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재산조사를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가에 귀속된 친일재산은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을 위한 지원금 및 독립운동 관련 기념사업에 우선 사용된다.

 글 권태욱 기자 사진 한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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