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1945년 해방 후 남북이 갈라지고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치르면서 무고한 민간인이 엄청나게 희생됐다. 국민보도연맹 학살, 거창양민학살, 노근리양민학살 등등. 이들은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 불가피하게 희생된 것이 아니라 전투와 전혀 관계없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 많이 포함된 것도 비극적이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피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가 있었으나 5·16 군사정변은 이들의 입에 다시 재갈을 물리고 침묵을 강요했다. 유족 및 후손들은 연좌제로 묶여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는 피해까지 감수해야 했다.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조직돼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추모사업 등을 완료했다. 이후 2002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2004년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위원회가 출범해 민간인 희생에 대한 진상을 하나씩 밝혀내고 피해자를 위로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구성돼 특정 위원회가 다루는 사안을 제외한 집단희생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을 벌이고 있다.
■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그동안 소설 등 예술작품을 통해 알려지고 시민단체 등에 의한 진상규명 요구도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2000년 1월 특별법이 제정되고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조직돼 진상규명의 길이 열렸다.
위원회가 2004년까지 3차에 걸쳐 희생자 신고를 받은 결과, 사망자 1만663명, 행방불명 3534명, 후유장애자 176명 등 모두 1만4373명이 접수했다. 위원회는 사실조사단의 현지 확인조사, 관계기관의 자료 및 증언 등을 통해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2006년 3월 29일까지 1만 3564명을 희생자로 결정했다. 4·3위원회는 사건의 전모를 규명해 자료집 12권, 증언록 7권과 함께 2003년 10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간하고 ‘제주도민과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사과’ ‘4·3평화공원 조성 지원’ ‘유가족들에 대한 실질적 생계비 지원’등의 대정부 건의안을 냈다.
1950년 7월 25일부터 4일간 충북 영동군 영동읍 하가리 및 황간면 노근리 일대에서 미군들이 피란 중이던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1960년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했지만 기각당했고 1990년대 이후 유족들 중심의 대책위원회가 진상을 폭로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 노근리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위원회
1999년 9월 AP통신은 당시 미군이 노근리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에 따라 학살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 한·미양국정부합동조사단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조사결과에 따라 희생자 및 유가족의 심사와 결정, 의료비 지급 등을 처리하기 위해 노근리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는 2005년 5월 218명을 희생자, 2170명을 유족으로 최종결정했다. 후유증을 앓은 사람 가운데 생존한 30명에게 최고 2100만 원에서 최저 300만 원까지 4억1858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국군 11사단 9연대가 700명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빨치산 토벌로 위장하려 했던 거창사건의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은 다른 사례보다는 일찍 이루어졌다. 1996년 1월 법률 제정이후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조직돼 사망자와 유족 여부를 결정하고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추진했다.
위원회는 사망자 548명과 유족 785명을 결정하여 명예회복시켰으며 호적 소실자는 호적을 복구했다. 또 2004년 추모공원 조성사업이 완료됐다.
김병훈 기자
| 4·3사건 진상규명및 명예회복위 양조훈 수석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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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2,original,right[/SET_IMAGE]제주 4·3사건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의 양조훈 수석전문위원은 위원회의 최대 성과로 국가가 공식 사과한 것을 꼽았다. 지난 2003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무현 대통령이 4·3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우리 역사상 국가의 과거 잘못에 대해 국가원수가 사과한 일은 4·3사건이 처음입니다. 위원회가 다년간 조사를 거쳐 확정한 진상조사보고서에서 제주 4·3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죠.” 양 위원은 그간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과제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희생자와 유족들이 반세기 가까이 불명예와 사회적 편견에 시달려왔는데, 이젠 이념적 굴레에서 벗어나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할 때라는 주장이다. “과거 역사를 규명하다보니 ‘과거형’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본질적으로는 미래를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더 비싸고 힘든 대가를 치를 수 있기 때문이죠.” 양 위원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해져야 한다며 앞으로 4·3재단을 설립해 미진한 부분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 유족 복지사업, 사료관 운영, 국제 교류 사업 등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선민 기자 |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1950년 7월 초. 충북 청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아내와 아들, 딸 3남매를 키우며 살아가던 박종철(당시 27세)씨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남이지서에서 보도연맹원들을 피신시켜 준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나섰다.
박씨는 부인에게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느냐”며 “아이들을 잘 키우라”는 말만 남기고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지서에서 지냈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박씨의 아들 박남순(63) 씨는 논일을 하다 옷도 채 갈아입지 않은 채 집을 나선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틀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박씨는 할머니와 작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은리 분터골로 달려갔다. 골짜기에는 수십 명의 시신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박씨는 아버지의 시신만이라도 수습하려 했으나 유해들이 훼손될까봐 찾는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합격하고도 신원조회 걸려 출근도 못해
그로부터 57년여가 흐른 2007년 8월 8일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영혼들의 넋을 달래주듯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죄가 있다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영문도 모른 채 도장을 찍어준 것밖에는 없습니다.”
철부지 아이에서 백발노인으로 변한 남순씨는 끝내 눈물을 떨궜다.
아버지는 ‘남로당 당원임을 고백하면 농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덜컥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것이 화근이 됐다. 전쟁이 나자 군·경은 과거 남로당 당원이었던 사람들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으로 예상, 이들을 대부분 학살했다.
박씨도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일로 인해 아들 남순 씨는 평생을 시달리며 살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평생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았어요. 1961년에 은행 입사시험에 합격했는데, 언제부터 출근하라는 얘기를 않더라고요. 아는 사람을 통해 나중에 알아보니 신원조회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그는 “해외로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만 근무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겨우 입사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매년 음력 5월 21일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서 숨진 억울한 원혼을 달래기 위해 술과 안주를 준비해 가지고 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부가 과거사 정리의 일환으로 보도연맹사건을 주목하자, 박씨는 청주·청원 보도연맹 유족회장을 맡아 그동안 숨죽여 지냈던 유족들과 함께 진상규명 활동을 벌이고 있다.
[SET_IMAGE]4,original,left[/SET_IMAGE]질곡의 삶 살아온 유족들 명예회복 길 열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이날 공개한 유해는 모두 70여 구에 달했다. 탄환이 박힌 엉덩이뼈도 발굴돼 그날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유해 주변에는 총살 당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권총·소총 등 4종류의 총탄 160점과 탄환, 탄피 20여 개도 나란히 진열됐다. ‘가운데 중(中)자’가 새겨진 단추도 발굴돼 희생자 중에는 중학생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당시 유해는 30여m에 걸쳐 길게 줄지어 있었고 유해는 두 겹, 세 겹씩 쌓여 있었다고 진실화해 위원회 유해 발굴 조사단 관계자는 전했다.
유해발굴을 주도한 유해 발굴 조사단 우종윤(충북대 박물관) 책임연구원은 “발굴된 유해들의 모습을 보면 민간인들을 줄지어 꿇어앉힌 뒤 등 뒤나 머리를 겨냥해 근접 사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 박사는 “분터골 발굴지는 살해 모습, 방법, 처리 등을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곳”이라며 “민간인 매장지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족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질곡의 삶을 살았던 유족들은 탄두가 박힌 엉덩이뼈와 유품들이 공개되자 당시의 처참함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이모(68·당시 11세)씨는 “군인들이 트럭 6~8대에 보도연맹원들을 싣고 와 분터골 골짜기 구덩이 앞에 세워 놓고 총살했다”며 “학살 후 군인 세 명이 이곳을 지키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총살이 있은 뒤 2년 동안은 시체 썩는 냄새가 마을에 진동하고 핏물이 흘러 누구도 이곳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날 그 광경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며 “요즘도 가끔 꿈으로 나타나 식은 땀을 흘릴 정도”라며 몸서리를 쳤다.
글 권태욱 기자 사진 한준규 기자


‘무죄! 무죄를 선고합니다.’
2007년 1월 23일,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재심 선고가 있었다. 32년 만에 이루어진 역사적 진실에 대한 복권을 넘어 상처받은 우리 현대사의 한을 풀어주는 선고였다.
32년 만에 드러난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의 진실 앞에 피해자와 유족은 묵은 세월에 대한 회한을 쏟아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강창덕(79) 씨는 “죽기 전에 진실이 밝혀져 기쁘다”면서 “누명을 벗지 못하고 사형당한 여덟 분도 기뻐하고 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고 하재완 씨의 부인 이영교(70) 씨는 “남편이 사형당한 후 2남3녀를 키우면서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했다”면서 “이제 고문과 사건조작 당사자의 양심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악의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1975년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철저히 조작됐다는 사실은 2005년 1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발표를 통해 밝혀졌다.
국정원은 2004년 11월 과거 의혹 7대 사건에 대한 규명작업을 적극 추진, DJ납치사건을 제외한 6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1979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납치·살해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과거 잘못을 인정했다.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에 대해 제기되어 왔던 안기부 조작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도 밝혀냈다.
위원회는 조사활동 시한을 1년 연장해 올 10월까지 그동안 손대지 못했던 간첩·노동·언론·사법·정치·학원 등 6개 분야의 의혹사건을 추가로 선정해 진실을 밝힐 계획이다.
경찰청은 2004년 11월 민간인 10명과 경찰청 5명으로 구성된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나주부대사건’ ‘서울대 깃발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 경찰 개입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을 진행 중이다.
위원회는 2005년 12월 중간조사발표를 통해 깃발사건 조사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있었으며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안기부, 검찰, 보안사가 개입하여 수사결과를 조작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도 2005년 5월 민간인 7명과 국방부 인사 5명으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신군부 집권과정, 강제징집, 삼청교육대 등에 대해 진상규명을 추진하고 있으며 2005년 12월 대학생 강제징집이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발표했다.
‘질식사’가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밝혀져
이 같은 권력기관들의 과거사 정리는 권위주의 정권시절 벌어진 각종 인권침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밖에도 2000년 8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윈회가 출범하고 2004년 1월 ‘삼청교육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정 등이 시행되면서 과거 인권침해의 진상을 규명하고 보상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2005년 2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가, 2006년 1월 대통령 소속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진상규명작업을 시작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1964년 3월 24일 (한일회담 반대 시위일) 이후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다 희생된 사람과 유족들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해 설립됐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고 보상금 지급을 준비하는 등 명예회복 6905건, 보상 469건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과거 군 복무 중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도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자살이나 사고사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사건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했으나 민주화운동 관련이 확인된 경우에만 해당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4년 군 의문사 전체의 진상을 재조사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을 권고하여 2005년 법률이 공포되고 2006년 1월 대통령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립됐다.
위원회는 올해 7월까지 600명의 진정을 접수하여 231건에 대해 본조사 결정을 내렸다. 45건에 대한 조사가 완료돼 잘못 처리된 11건의 진상이 규명됐다.
위원회는 지난해 12월 단순사망으로 처리됐던 2건에 대해 ‘구타에 의한 사망’ 결론을 내려 처음 의문사의 실체를 밝혔다. 1980년대 야전부대에서 발생한 김모 하사 사망사건에 대해 군수사당국은 회식 후 구토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했다고 했으나 실제 선임부사관의 구타로 사망했음을 밝혀냈다.
권태욱 기자
| 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지원위원회 송병헌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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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5,original,left[/SET_IMAGE]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지원위원회 송병헌 전문위원은 사건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현대사를 정리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새롭게 도약하는 데 작은 역할이나마 했다는 자부심이 크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이른바 ‘빨갱이’로 매도돼 모든 관계가 끊기고 오랫동안 구금됐던 사람이 늦게나마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돼 주변 친척들과 이십여 년 만에 만나고 사과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줄 때 느끼는 보람은 정말 크죠.” 그러나 위원회가 너무 늦게 설치돼 신청자들이 이미 사망했거나 고령이 돼 중요한 진술을 청취할 수 없을 때라든지 병원진료기록의 보존연한이 길어야 10년이어서 증빙자료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면 현장 조사관들의 아쉬움은 무척 크다고 전했다. 현재 1만여 건이 넘는 사건이 신청 접수된 상황이지만 전문위원이 10명밖에 되지 않아 더 빨리 처리할 수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는 말도 덧붙였다. 송 위원은 제대로 된 민주화운동의 평가를 위해서는 금전적 보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 각 소관 부처에서 후속조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초중고 교과서의 한국 현대사 관련 부분을 교정해 그 성과가 사회적으로 규범화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거나 기념공원 등 기념사업을 통해 국가를 위한 정신의 숭고함을 기리는 일, 드러나지 않았던 사건을 복원해 민주화의 여정에 참여했던 개인들의 명예를 높이는 일 등이 범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진행되길 기대해 봅니다.” 이선민 기자 |

[SET_IMAGE]6,original,left[/SET_IMAGE]늠름하게 자란 아들을 군대에 보냈는데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부모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더구나 아들의 몸이 온통 멍자국 투성이어서 도저히 자살이라고 믿기지 않는데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떠나보내야 했다면….
1996년 10월 22일 강원도 모 교도소 경비교도대 박정훈 이교(당시 20세)가 사망했다. 건국대 기계공학과 2학년을 다니다 8월 14일 자원입대했고 교도대에 배치된 지 4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가산 탕진하고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
박 이교의 아버지 박노상 씨가 ‘아들이 기절해 쓰러졌다’는 교도소 측의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가니 아들은 온몸에 시퍼렇게 멍자국이 가득한 채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하루 전 공중전화로 ‘무섭고 힘들다. 근무지를 옮겨줄 수 없느냐’는 아들의 하소연을 들었던 아버지 박노상 씨는 ‘얼굴 피부병이 원인인 우울증과 내성적 성격으로 투신자살했다’는 교도소 당국의 설명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하소연하고 수소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변호사들도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박씨는 가난한 살림에도 잘 키우고 싶었던 둘째 아들을 그렇게 보내야 했다.
사랑하던 아들을 보내고 박씨의 생활은 엉망이 됐다. 그저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단란한 가정도 무너졌다. 조그맣지만 가족과 함께 했던 집도 팔고 옥탑방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아내와도 헤어지고 큰 아들과는 가끔 전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뿔뿔이 흩어졌다.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월 18만 원의 생계지원비를 받으며 그저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말이 적은 편이지만 공부도 잘하고 영리한 아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살할 이유가 없는데… 아들 생각이 나면 분하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저 술만 먹으며 자포자기했다. 한 때 죽으려고도 했고….”
2005년 천주교 인권단체 쪽의 문을 두드렸고 군경의문사 진상규명 유가족협의회에 참여해 시위도 했지만 희망적인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2006년 3월 17일 온갖 서류를 준비해 진정을 제기했다. 위원회는 6월 22일 조사를 개시했고 6개월 만인 12월 12일 ‘선임자의 구타와 욕설 등 가혹행위가 사망에 영향’을 주었다는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당시 교도소측은 박씨가 제기했던 구타 등에 대한 의혹을 밝히는 데 소홀했으며 오히려 경비교도대의 일상적 가혹행위를 은폐하려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선임대원들은 내무반에서 날마다 술판을 벌이고 후임대원에게 ‘원산폭격’ ‘관물대 위에 발 올리고 깍지끼고 엎드려뻗쳐’ ‘가슴구타’등의 폭력을 행사하거나 잠 안재우기 등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끼니 때마다 세 명이 먹어야 할 분량의 식사를 선임대원들의 강제에 의해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어 치워야 했다.
심지어 일부 선임대원들은 후임대원들에 성추행을 자행했으며 이를 거부하면 다른 후임대원들도 깨워서 무자비하게 구타하기도 했다.

의혹 남지 않도록 진상규명 작업은 계속돼야
당시 보안과장과 소대장, 선임대원들은 부인했지만 박정훈의 동기대원들 다수가 구타나 가혹행위에 대한 진술을 하지 말라는 선임대원들의 강요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동기생들이 양심선언을 해줘서 진상이 밝혀졌다. 조사관들과 함께 내무반도 둘러보고 가혹행위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 심했다. 다른 애들보다 학력이 높은 편이라 밉보였는지 3시간 동안 맞기도 했다는데 1960년대 하사로 제대한 나도 그런 가혹행위라면 못 견뎠을 것 같다. 정말 기가 막혔다.”
위문사위는 “박정훈은 경비교도생활 4일 동안 지속된 구타와 욕설, 식사강요 등 가혹행위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며 “그 결과 우울증세가 악화돼 자살했기에 직무수행 중 사망한 자에 해당한다”고 밝히고 법무부장관에게 사망구분 사항 심의를 요청했다. 그리고 지난 4월 10일 법무부 교정당국이 ‘순직’으로 사망구분을 결정했고 국가유공자 예우문제는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억울한 죽음을 밝혀낸 것은 정부가 정말 잘한 일이다. 위원회 조사관들이 어려운데도 많이 노력하고 도와줬다.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의문사위에 접수된 사건이 굉장히 많고 진상이 밝혀진 사건은 아직 얼마 되지 않는다. 군대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상규명 작업은 노 대통령 임기가 끝나더라도 계속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의혹이 남거나 억울한 부모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 놓고 자식을 군에 보낼 것 아닌가.”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박씨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길에서 군인과 마주치거나 비슷한 나이의 사람을 보면 ‘내 아이도 저런 모습으로 살 수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고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박씨의 유일한 소망은 아들이 국가유공자로 결정돼 모든 억울함을 깨끗이 씻어내고 명예를 회복하는 일. 그것 말고는 아무 계획도 없다고 말한다.
김병훈 기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11월 말 1961년 조용수 민족일보사 사장 처형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의 부당한 법률적용과 불법 구금 등 위법사실을 확인하고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다. 군사정권의 대표적인 진보세력 탄압사건이 45년 만에 명예회복의 실마리를 찾았고 2005년 12월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첫 성과라는 의미를 담은 결정이었다.
위원회는 여러 한계를 안고 출범했다. 입법과정에서 강제조사권이 삭제됐고 동행명령권과 청문회는 휴지조각이 됐다. 예산과 인력은 당초 계획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위원회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권위주의 시절 등 폭넓은 시기에 걸쳐 뒤틀린 온갖 과거사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는 성과를 일궈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건에 대한 결정 이후 지난 7월 3일까지 진실규명이 내려진 사건은 △장도원의 함흥만세운동 사건 등 항일독립운동 사건 4건 △나주 동박굴재 사건 등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299건 △양평지역 적대세력 사건 등 적대세력 사건 37건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 등 인권침해 사건 22건 등 모두 363건에 이른다. 진실규명 불능 결정이 내려진 사건은 항일독립운동인 지복동의 일제시기 행방불명 후 사망사건 등 6건이다. 특히 위원회는 민간인 집단희생으로 신청된 7539건을 성격과 유형 그리고 발생지역 등을 종합 검토해 9개 사건 유형으로 나누고 이 중 1222건에 대해 올해 조사에 착수했다. 경남 김해시, 전남 구례군, 충북 청원군 등 전국 9개 지역에서 올 연말까지 유해발굴과 정확한 피해자 현황 조사를 끝낼 계획이다.
송기인 위원장은 “진실규명 신청을 해온 1만 894건 중 9212건(84.5%)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으며 이 중 363건(3.3%)이 진실규명 됐고 8843건은 현재 조사 중에 있다”고 말했다. 송 위원장은 “어느 사건도 배제할 수 없다. 과거사 문제는 누가 관련됐든 이번에 꼭 매듭짓고 가야 한다”면서 “할 일은 어마어마하고 어려운데 직원은 192명뿐이며 조사원은 그 중 절반이니 일이 느릴 수밖에 없다”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는 “현재 인원으로 조사를 마무리하는 데 13년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다. 130∼140명만 더 있으면 될 텐데 정부와 국회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권태욱 기자



1996년 4월, 전 세계의 이목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집중됐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 불리는 인종분리정책이 자행된 기간 중 국가적 범죄와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조사를 골자로 한 공청회 때문이었다. ‘가해자를 사면할 것인가, 처벌할 것인가’ 등 그 방법론을 둘러싸고 여론이 분열됐다. 백인사회에서는 ‘마녀사냥이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의 소리도 높았다.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TRC)는 이 같은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만델라 대통령의 전 부인 위니도 살인교사 혐의로 소환하는 등 아프리카민족주의(ANC)나 기타 해방세력 측의 인사들에 대한 조사도 철저히 했다. 공평하고 투명하게 활동을 진행한 것이다. 철저히 국가적 범죄자와 인권침해자의 처벌에만 초점을 맞췄다.
TRC는 1996년 구성됐다. 만델라 대통령이 과거 청산을 위해 집권 이듬해인 1995년 제정한 ‘국민통합 및 화해 증진법’에 근거해서다.
TRC 위원은 모두 17명. 정파·사회단체별·성별·인종·분야·지역별로 골고루 안배해 공개 추천과 선정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했다. 위원장직에는 188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투투(Desmond tutu) 성공회 주교가 선임됐다.
TRC의 주요 임무는 △1960년 3월 1일에서 1994년 5월 10일 사이에 남아공 국내외에서 일어난 중대인권침해 사건을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상황과 원인을 조사하고 △국가적 범죄자와 인권침해자를 처벌하는 한편,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적절한 보상을 정부에 권고하는 것이다.
투투 위원장은 “(2차 대전 종결 후 나치전범을 처한) 뉘른베르크식 사법청산을 시도했다면 평화롭게 이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서에서 밝혔다. 사면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과거 독재를 자행했던 세력이 저항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지난 일은 잊자’는 주장도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용서를 위해서도 진실을 밝혀야 했다. 아파르트헤이트시기에 저질러진 가혹행위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증거가 인멸됐었다. 그럼에도 TRC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조건으로 가해 당사자를 사면해줌으로써 보다 광범위한 사실들을 밝혔다. TRC는 1998년 10월 3500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그 활동을 마쳤다.
이 보고서는 ‘범죄적 과거’에 대해 비교적 공정한 입장에서 청산을 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남아공의 해법에 대해 세계 각국에서 관심을 보였다. 진실규명과 국민 화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과거청산의 모범 사례라는 것. 과거청산작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사회통합은 물론 국가이미지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권영일 기자

[SET_IMAGE]7,original,left[/SET_IMAGE]오늘날 한국은 어엿한 민주국가로 성장했다. 선진국들에 견주어도 크게 손색없는 민주적 제도가 정착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오랜 시련의 역사를 헤치고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밖으로 드러난 성장과는 달리 안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우리는 숨죽인 세월을 바로 얼마 전까지 살아왔다. 그러는 중에 주위에 어떤 아픔이 있는지 어떤 억울함이 있는지 어떤 희생자가 있는지 따뜻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제라도 잠시 주위를 살펴보면 무관심 속에 참으로 많은 분들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잘못된 역사, 잘못된 과거사로 인해 억울하게 겪는 이웃들의 아픔인 것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이웃이 겪는 고통, 슬픔, 상처도 자기가족의 일처럼 여기면서 위로하며 외면하지 않고 보살펴 주었다.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왔으며 공동체적 전통과 사회적·혈연적 유대가 깊어 과거의 잘못이나 개인의 불명예를 시간이 흐른다고 쉽게 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더 이상 야만의 시대가 남긴 상처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웃들의 과거사를 방치한 채 미래의 더 크고 복잡한 과제들을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사로 발목이 잡힌 분들을 두고서는 화해의 미래, 상생의 미래, 희망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미래는 우리 모두가 함께 손잡고 나아갈 때 찬란하게 열린다.
과거사는 걸림돌처럼 우리 사회의 발목을 걸고 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조그만 걸림돌이라도 앞길에 큰 장애가 된다. 현재는 누적된 과제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역량으로 이를 감당하기가 벅차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만일 외면하고 그냥 지나치려 한다면 오래지 않아 더 큰 숙제로 다가올 것이다.
과거사는 과거의 법률을 적용할 수도 없고 현재의 법률을 적용해 사법적으로 처리하기도 곤란한 문제들이다. 그 때문에 오늘의 건전한 상식에 의거해서 지혜를 모아 비사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과거사 정리란 한시적이고 특별한 기구를 만들어 정해진 시간에 과거사를 해결하도록 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일이다. 민주화 이행기에 제기되는 과거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 새삼 과거사 문제가 크게 부각되는 것도 그만큼 사회가 성장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민주화로 지난날에 묻혀있었던 진실들도 드러나게 되고 과거사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 있게 된다. 사회발전과 역사변화에 따라 국민들의 인권의식도 높아지고 역사인식도 높아진 것이다. 그에 따라 지난날의 과오를 청산해야 할 당위적인 요구도 높아진다. 비로소 묵은 숙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과 조건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거사 문제가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에 제기되는 까닭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인종차별로 악명이 높았고 세계의 대부분 국가들로부터 외면당해 왔었다. 그런 나라가 이제는 과거의 불행을 지혜롭게 극복한 과거청산의 모범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은 개선된 인권을 바탕으로 월드컵을 개최하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경제성장국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오늘날 비슷한 과거사 문제를 안고 있는 수많은 나라들이 남아공에서 배우고자 한다. 독일 또한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고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했던 나치의 폭력으로 상징되던 국가였지만 이제는 세계의 평화와 인권을 가장 앞서서 이끌어 가는 초일류 인권국가이다.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철저한 청산을 통해서 이룩한 성과이다. 이는 일본이 지난날의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음으로써 경제력에 상응하는 역할과 대접은커녕 여전히 국제적 비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크게 대비되는 일이다. 비록 과거의 오욕이더라도 이를 극복하기에 따라서 현재와 미래의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좋은 교훈들이다.
우리나라도 식민통치와 분단, 전쟁, 그리고 연이은 독재와 군사 쿠데타로 인해 숱한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그런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민주국가로 거듭난 과정은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한국의 반침략 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20세기 인류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성과들이다. 더 나아가 잘못된 과거사를 딛고 21세기 괄목할 만한 민주국가로 성장한 과정 또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과거사 청산의 과제를 안게 될 중남미나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은 우리의 경험을 유용하게 참고할 것이다. 그렇게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합을 이끌고 지역 공동체 건설에 앞장설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권신장과 민주화에 기여할 때 우리는 인류사회의 주요한 지도적 국가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세계 각국의 진실화해위원회 사례들을 연구한 프리실라 헤이너는 과거사 정리가 다섯 가지 기본 목표를 지니게 된다고 했다. 첫째, 과거의 폐해를 밝히고 명백히 하며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둘째, 희생자들의 특별 요구에 응한다. 셋째, 정의를 세우고 책임을 묻는다. 넷째, 제도의 신뢰성과 개혁을 위한 윤곽을 제시한다. 다섯째, 화해를 촉진하며 과거에 대한 갈등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침묵과 부정으로 일관해 오던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큰 효력을 지니게 되며 과거사청산을 통해 당초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정의의 실현과 책임 추궁이라는 면에서 장기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처벌이 유예되고 피해에 대한 보상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과거사로 인한 갈등은 해소되고 사회정의가 확립되고 미래 지향적인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사를 만들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기본은 양심과 사회정의이다. 정의와 양심은 우리가 지향할 덕목이자 성숙의 원동력이다. 사회전환이라는 역사적 도전 앞에 과거사 청산을 통한 진실과 화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순리적인 대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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