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농사는 천하대본이라는 말은… 억만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 농민은 세상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서울 서대문 네거리 농업박물관 앞에 서 있는 대형 돌비석에 새겨진 <농민독본(農民讀本)>의 한 구절이다. 이 <농민독본>을 저술한 사람이 바로 매헌 윤봉길 의사다. 흔히 윤 의사는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의 주인공으로만 기억되지만, 그는 청년 시절 고향에서 농촌 계몽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운동을 벌였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는 ‘매헌 윤봉길기념관’이 있다. 1988년 문을 연 이 기념관에는 <농민독본>을 포함한 각종 서책류와 서한, 의거 당시의 소지품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1층에 들어서면 왼쪽 벽에 훙커우공원 의거 장면이, 오른쪽 벽에는 농촌에서 배움의 길을 여는 윤 의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908년 6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윤 의사는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해 한학을 공부했다. 윤 의사는 19세 되던 해인 1926년부터 고향에서 농촌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을 집필했다.
농민단체를 만들어 계몽운동과 민족운동으로 넓혀가고자 했던 윤 의사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1930년 3월 더 큰 뜻을 품고 집을 나서 이듬해 5월 우리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 도착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큰 뜻을 털어놓고, 일왕 생일 경축행사가 열리던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수뇌부가 도열한 단상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 10여 명의 군·정 수뇌들을 사상케 했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돼 그해 12월 19일 24세 나이로 순국했다.

윤 의사의 의거 소식에 중국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 한국인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했고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윤 의사의 의거는 이때까지 미미한 존재이던 임시정부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누가 임시정부에 관심을 두었습니까? 그저 백범 한 사람이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임정 간판을 메고 다녔지요. 그러다가 윤봉길 의사 의거가 있게 되어 임정이 살아났습니다.”
독립운동가 정화암 선생(1981년 작고)은 “광복과 더불어 귀국할 때 임정을 앞세워 떳떳하게 나선 것도 모두 윤봉길 의사의 피 한 방울의 결과”라고 말해왔다.
이렇게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윤 의사의 탄신 100주년이던 지난해 사단법인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김학준)는 다큐멘터리 <아! 윤봉길>을 제작, 대전 MBC TV를 통해 방영했다. 또 ‘윤봉길 의사의 항일투쟁과 한중 상호작용’이라는 주제로 한중일 기념국제학술회의(6월 18일)가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됐다.
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윤 의사에 대한 사실도 바로잡았다. 윤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 단상에 던진 것은 수통형 폭탄이며,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으로 지참한 것이었다. 진위 논란이 일었던 윤 의사 의거 직후 체포 사진도 진짜로 밝혀졌다. 지난해 12월 17일 매헌기념관에서 열린 ‘매헌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윤 의사의 연행 장면이 맞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올해 4월 29일 윤 의사 의거 77주년 기념행사를 상하이(오전 10시)와 서울(오전 11시)에서 동시에 열 예정이다.
매헌기념관에는 윤 의사가 거사를 앞두고 고향의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긴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라는 편지가 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서울 용산구 효창동과 청파2동 등에 자리한 널찍한 효창공원은 백범 김구 선생과 항일투쟁을 하다 목숨을 바친 삼의사,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 3인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효창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30m 되는 곳에 임시정부 요인 묘소가 있고, 북쪽으로 30m쯤 올라가면 삼의사 묘가 보인다. 삼의사 묘는 백범 선생이 광복 후 일본에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의 유해를 모셔와 만든 곳이다. 삼의사 묘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나란히 모셔져 있다. 1948년에는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선생의 유해가 모셔졌다. 1949년에는 백범 선생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됐다.

삼의사 묘역 앞에는 1990년 이곳에 유해를 모신 순국선열 7위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건립돼 매년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3일 합동추모제전을 지내고 있다. 매년 3월 13일은 이동녕추모협회 주최로 이동녕 선생 추모행사가 열리며, 매년 6월 26일에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백범 선생 추모제가 열린다.
효창공원 한쪽에는 2002년 10월 개관한 백범기념관이 있다. 백범기념관에는 동학, 의병, 애국계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통일운동 등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백범 선생의 일대기와 관련한 각종 기록과 자료가 디오라마, 모형, 애니메이션 등 최첨단 전시기법을 활용해 전시돼 있다. 또한 백범 선생과 임시정부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와 민족운동과 관련한 전문 자료실 등이 있다.

지난 3월 1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에서는 임시정부 지도자이자 흥사단을 창립해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순국 71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1973년 도산 선생의 애국정신과 교육정신을 기리고자 조성한 도산공원에서는 매년 3월 10일 흥사단과 도산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추모기념행사가 열린다.
공원 입구에서 똑바로 걷다보면 도산 선생과 부인의 유해를 합장한 묘소가 있다. 동쪽으로는 동상과 동상을 중심으로 산책로가 둥글게 나 있다. 기념관에는 도산 선생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는 사진 70여 점과 편지들이 있다. 또 흥사단에서 활동할 때 작성한 문서들, 임시정부 사료집, 도산일기 등이 전시돼 있다. 도산어록과 연보, 사진은 터치스크린으로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지난해 6월 도산 선생 탄생 130주년을 기념해 도산학회와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민족수난지도자와 그 가족의 삶’을 주제로 한 특별사진전이 열리기도 했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공원 안 돌비석에 새겨진 ‘도산의 말씀’은 도산 선생이 남긴 어록 가운데 하나로 그의 교육과 애국 사상을 한눈에 보여준다.

[SET_IMAGE]2,original,right[/SET_IMAGE]“정부는 국민의 종복이요, 국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함께 1896년 순한글과 영문판 독립신문을 창간한 분이 송재 서재필 선생이다. 송재 선생은 같은 해 독립협회를 창설했고, 이듬해(1897년)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국민 성금으로 독립문을 건립했다. 원래 종로구 교북동에 있던 독립문은 1979년 서대문구 현저동 지금의 자리로 이전 복원됐으며 1992년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연계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독립문과 머지않은 자리에 송재 선생의 동상이 있다.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이기도 한 송재 선생은 1864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해 18세에 관직에 진출했다가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자격증을 취득했다. 평생 조국과 미국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송재 선생은 3·1독립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위원장을 맡았다. 선생은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독립을 청원하고 1925년 호놀룰루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규탄했다. 1951년 작고한 선생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서대문 독립공원은 지난해 8월부터 인근 노후 불량주택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근대사를 상징하는 민족의 성지로 재조성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오는 7월 20일 새롭게 문을 열 예정이다.
글·박경아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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