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부산시 금정구청 환경미화원 신순옥(57) 씨는 30여 년 전인 1974년의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금정구청에서 청소차량을 운전한 지 석 달 된 남편이 그날 “저녁 근무 마치고 동료들과 송년회를 하기로 했으니 먼저 자”라는 말을 남긴 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튿날인 새해 아침, 파출소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남편을 발견했을 때, 신 씨는 목 놓아 슬픔을 토해낼 겨를도 없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신 씨의 뱃속에는 남편이 남기고 간, 석 달 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로 졸지에 가장이 된 신 씨는 남편이 일하던 그곳에서 33년 동안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것도 65명의 환경미화원을 관리하는 ‘총감독’ 자리에 올랐다. 신 씨는 지금도 남편을 떠나보낸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미어진다고 한다.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숱한 나날을 숨 죽여 울었다는 신 씨의 두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처음에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어요. 보상금으로 나온 150만 원은 시댁에서 다 가져가고 구청에서도 저를 순순히 받아주지 않았어요. 남편이 환경미화원이 아니라 운전기사였기 때문에 저를 쓸 수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군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어요. 저와 뱃속의 아이가 살 길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석 달을 끈질기게 매달렸더니 구청장님이 제가 안쓰러웠던지 자리를 주셨지요.”
당시 구청엔 신 씨 외에도 16명의 여성 환경미화원이 있었다. 대부분이 신 씨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편의 직업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환경미화원이 내리막길에서 리어카 무게에 눌려 변을 당하거나 새벽에 음주운전 뺑소니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경우 아내는 남편의 뒤를 이을 수 있었다. 가장을 잃은 가족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여성이 해내기엔 노동 강도가 세고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 씨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몇 번 있었죠. 한번은 내리막길에서 쓰레기로 가득 찬 리어카를 끌고 가는데 승용차가 리어카 옆을 긁고 지나가지 뭐예요. 쓰레기 무게 때문에 리어카가 앞으로 쓰러질 듯한 상황에서 발뒤꿈치에 단단히 힘을 주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거든요. 하마터면 그날 쓰레기더미에 깔려 저승으로 갈 뻔했어요. 그 짧은 순간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이대로 나까지 떠나면 아이들은 어쩌나 하는 절박함이 저를 살려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때로는 모든 것을 접고 시동생의 권유대로 경남 창녕의 시골집으로 돌아가고픈 유혹을 느끼기도 했지만 남편의 무덤 앞에서 했던 다짐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었다.
“남편에게 당신 직업으로 정년까지 마치고 아이들도 잘 키우겠다고 했어요. 그건 남편과의 약속이면서 저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해요. 어떻게든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어요.”
환경미화원으로 일한 지 석 달 만에 둘째딸을 낳은 신 씨는 두 달 동안 출산휴가를 간 것 말고는 20년 넘게 쉬지 않고 일했다. 새벽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환경미화원 업무가 끝나면 곧바로 산동네와 좁은 골목들을 돌며 쓰레기를 수거해 큰길에 내놓는 부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느라 아이들과 대화하는 건 고사하고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힘든 날이 허다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엄마를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착하고 반듯하게 자라준 두 딸을 생각하면 그저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에요. 두 딸 모두 결혼했는데 큰아이는 식당을, 작은아이는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어요. 둘 다 똑 소리가 납니다(웃음).”
남편과 약속한 정년까지 이제 3년을 남겨둔 신 씨는 “지난날을 돌아보면 아이들을 좀 더 살갑게 대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하지만 가장이자 아빠 노릇까지 도맡아 하면서 꿋꿋하게 살아온 엄마 신씨는 두 딸에게 지금도, 앞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존경스러운 존재”다.

[SET_IMAGE]2,original,right[/SET_IMAGE]2년 전 열일곱 살 연상의 남편을 만나 서울 송파구에 다문화가정을 이룬 베트남 여성 여선영(레티투 프엉·23) 씨. 해맑게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여 씨는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한국생활 정착에 성공한 사례다.
“베트남에서 한국드라마를 즐겨보며 한국을 내심 동경했어요. 특히 ‘겨울연가’와 ‘천국의 계단’을 재미있게 봤는데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해 보이는 한국 남자들도 그렇고, 베트남에서는 볼 수 없는 눈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어요. 그래서 괜찮은 한국 남자가 있는데 만나보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았을 때 싫지 않았어요.”
남편은 여 씨를 보기 위해 베트남을 찾았고, 첫눈에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곧바로 결혼에 골인했다. 언어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른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여 씨는 한국음식은커녕 한국말도 할 줄 모르는 답답한 며느리라고 밉보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좀처럼 떨칠 수 없었다.
“시아버지께서 목소리가 크세요. 아버님이 저를 보며 무슨 말씀을 하시면 저를 혼내시는 것만 같았어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나더라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 아버님께선 제게 반찬 이름들을 가르쳐주셨던 거예요. 정신 바짝 차리고 배운 덕에 금세 익혔죠.”
남편은 여 씨가 말이 통하지 않아 겪는 불편함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책을 여러 권 사다가 직접 한국어를 가르쳤다. 시아버지도 한 수 거들었다. 시어머니는 음식을 만들 때마다 열심히 시범을 보이며 요리 비법을 전수해줬다. 비록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자신을 친딸처럼 너그러이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가족들 덕분에 여 씨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남편은 제가 꿈꿨던 바로 그 한국남자였어요. 저한테도 따뜻할 뿐 아니라 친정 식구들에게도 잘했어요. 남편이 일하러 가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시아버지와 청소하러 다니는 시어머니도 집을 비우고 나면 저 혼자서 외로울까봐 집 근처에 있는 송파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줬어요. 그 덕에 매일 두 시간씩 한국말, 요리, 컴퓨터, 노래, 양재 같은 것을 배우고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난해 여름 단란하던 가정에 위기가 닥쳤다. 경제한파의 영향으로 건축 일을 하던 남편의 일거리가 뚝 끊긴 것이다. 다행히 남편은 오래지 않아 백화점에서 상품을 관리하는 일용직 사원으로 채용됐지만 지난해 7월 25일 아들이 태어나던 날에 다시 실직을 하고 말았다. 남편이 출산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회사에 통보하지 않고 결근한 게 화근이었다. 남편은 지금까지 이렇다 할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지금은 젖먹이 아들 종석이와 여 씨, 남편까지 시부모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남편이 집에서 논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결혼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많은 나이 차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없고요. 다만 남편이 지금의 시련을 잘 극복하길 바라죠. 시부모님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뿐이고요.”
한국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모습이 아직은 거북하지만 한국인 ‘여선영’으로 적응하며 살아가려면 그쯤은 견딜 만하다는 여 씨. 지금 그의 소망은 오로지 한 가지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하루 빨리 양재 기술을 완벽하게 익혀 시부모와 남편의 짐을 덜 수 있는 ‘일하는 여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발로 밟는 수도장치 ‘발바리’를 개발한 김예애(80) 할머니도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세상의 편견에 맞서 승리를 거둔 여성이다. 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찾은 서울 종로구 종로4가의 ‘이지 밸브’ 사무실은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맨 꼭대기인 6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20, 30대 젊은이도 오르기에 숨 가쁜 높이의 계단을 매일 두세 차례 오르내린다는 김 할머니는 “매일 이리로 등산하러 오는 기분”이라고 했다. 나이보다 한참 젊어 보이는 김 할머니는 2002년 발바리 수도 특허증을 받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거지를 하다보니 물 낭비가 너무 심하더라고요.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설거지도, 수도꼭지 조절도 모두 손으로 해야 하니까 물을 아끼고 싶어도 중간중간 수도를 잠그면서 설거지하기가 귀찮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 손으로는 설거지만 하고 수도꼭지 조절은 발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발바리를 개발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수도 관련 회사를 수도 없이 다녀봐도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모두들 집에 가서 손자나 보라는 식이었어요.”
그렇다고 그쯤에서 포기할 김 할머니가 아니었다. 남편과 일찍이 사별하고 아들 하나를 키우기 위해 교사, 잡지사 광고국 영업사원, 자수공장 사장 등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살아온 자신이 아니던가. 기계에 문외한이던 김 할머니는 발바리 수도의 금형까지 일일이 쫓아다니며 배운 정성으로 특허증을 따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이라 생각했던 김 할머니의 기대는 빗나갔다. 팔고 싶어도 어떻게 팔아야 할지 막막했던 것.
“주방용품 회사에서 선뜻 사줄 줄 알았는데 손을 내미는 곳이 없더라고요. 발명하는 사람 따로 있고, 마케팅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아들에게 시키려 해도 학생들 가르치는 교수라서 마케팅은 도통 몰라요. 하는 수 없이 지금은 이지밸브 인터넷 사이트(www.easyvalve.co.kr)를 통해 팔고 있어요. 설치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해 놓았죠.”
국내에서는 아직 마땅한 판로를 찾지 못한 할머니는 최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각 대학 무역학과 학생들이 발바리 수도를 전시하고 홍보한 일이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주리라 기대하고 있다. 두바이 전시회는 한 TV프로그램에서 발바리 수도를 이용해 80%의 절수 효과를 입증하는 장면을 본 무역학과 학생의 제안과 정부의 후원으로 성사됐다고 한다. 이제 김 할머니의 꿈은 전 세계 각국과 국내 임대아파트에 발바리 수도를 공급하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임대아파트를 다량 짓는다고 하는데 그런 아파트에는 물세를 아낄 수 있는 발바리 수도가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거기 사는 어려운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아낄 수 있게요.”
젊은 시절 남편을 잃는 아픔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열정과 끈기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김 할머니. 오늘도 할머니의 굳은살 박인 두 손과 발은 쉼 없는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글·김지영 기자


지금도 사회 곳곳엔 “여자는 안 돼”라는 말이 통용되는 남자들만의 성역이 존재한다. 여성의 역사는 이런 성역에 도전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의 CSI로 불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 정희선(54) 소장은 53년 국과수 역사상 최초의 여성 소장이다. 2002년 국과수 최초 여성 부장으로 임명된 데 이어 지난해 7월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소변이나 모발에서 필로폰을 검출해내는 기법을 비롯해 약·독극물 관련 특허 4개를 보유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국과수에서 하는 일 자체가 남자들도 견디기 힘든 부분이 많아요. 시신을 부검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신의 위에서 검출된 내용물을 분석하는 일도 여간 곤혹스럽지 않죠. 게다가 항상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오래 버티기가 힘듭니다.”
1978년 처음 입소 당시 국과수의 여성 연구원은 단 두 명뿐이었고, 3년 이상 버틴 여성 연구원은 국과수가 생긴 이후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여직원이 50명이 넘는다. 최근엔 시신을 부검하는 법의관도 두 명이나 새로 들어왔다. 여성이 없는 부서가 거의 없을 정도다. 정 소장이 길을 개척한 덕이다.
“저 역시 한때는 승진이 안 돼서 퇴직을 고민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일이 좋으니까 버티겠더라고요. 미지의 물질에서 사건을 해결할 단서를 찾는 재미가 있어요. 해결하지 못할 땐 꿈속에서도 괴롭지만, 해결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다 못하죠.”
정 소장은 과학수사는 여성이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다. 여성이 남성보다 사물을 더 섬세하게 관찰하기 때문에 사건 해결 단서를 찾는 데 유리하다는 것.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을 여성 연구원의 힘으로 해결한 것도 많아요. 특히 몇 년 전 유괴사건의 유일한 단서인 음성을 분석해 범인을 찾아낸 것은 여성의 섬세함이 빛을 발한 경우죠. 우리 연구원들이 모발에 있는 극미량의 마약 성분을 찾아내는 기술은 세계적 수준이에요.”
그는 “능력 있는 여성 연구원이 육아문제 등으로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며 정부가 육아·복지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남성 중심의 조직이던 국과수에서 30년을 보낸 그는 여성 직장인 후배들에게 ‘사회생활’ 노하우도 귀띔했다.
“젊을 때부터 배려를 배우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어야죠. 자기 것만 고집해서는 ‘인간 네트워크’를 만들 수가 없어요. 여기는 일 자체가 너무 힘드니까 술을 많이 먹는 편이에요. 저는 술을 잘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독한 술을 마실 때 맥주라도 마시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어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가서 한번 참여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남해지방해양경찰청 민꽃별(32) 경위도 성역 하나를 깬 ‘최초의 여성’이다.
“어려서부터 바다와 경찰이 좋아 한국해양대 해양경찰학과에 진학했고, 2000년에 특채로 경사가 됐어요. 당시만 해도 6000여 명의 해경 중 여경은 12명뿐이었죠. 그런데 모두 사무실 근무만 하고 있었어요. 전 경비정 근무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틈틈이 배를 타다 2005년 경위로 승진하면서 발령을 내달라고 했죠. 당시 서장님이 트인 분이라 제가 최초의 여성 경비정장이 될 수 있었어요.”
해양경찰 경비정은 해상이나 선박에서 발생하는 형사사건, 인명구호, 조난선박 구조, 해양오염 방제활동 등을 수행한다. 또한 배타적 경제수역(EEZ) 안에서 불법조업하는 외국어선을 단속하고 우리 어선의 조업활동을 보호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뱃일은 아무래도 여성이 하기엔 고되다. 특히 조난한 사람들을 구조할 땐 솔직히 여자라서 힘에 부친다고 한다. 반면 여자라서 좋은 점도 있다. 민원인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짧게는 이틀 사흘, 길게는 일주일씩 바다에서 생활하다 보면 자칫 삭막해지기 쉬운 경비정 분위기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그의 뒤를 따라 경비정 근무를 하는 여경들이 지금은 30여 명에 이른다. 곧 또 한 명의 여성 경비정장이 배출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초계기 레이더 탐색 여경, 해경 여성 특공대원이 탄생하는 등 해경 내에서 여성 파워가 점점 커지고 있는 데 대해 민 경위는 기쁘기만 하다. 그의 꿈은 경정이 되어 5000t급 대형 해양경찰 경비정을 지휘하는 것이다.

[SET_IMAGE]4,original,left[/SET_IMAGE]재계에서도 ‘유리천장’이 뚫리고 있다. 지난 1월 CJ그룹 계열사인 CJ엔터테인먼트 대표에 김정아(47) 상무가 취임하면서 30대 대기업 최초로 여성 CEO가 탄생한 것.
김 대표는 1986년 미국에서 프로듀서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문화콘텐츠산업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아 왔다. 특히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해외 사업에서 좋은 성과를 냈다. 2005년에는 CJ 배급마케팅 부장으로 스카우트됐고, 이듬해 해외영화사업본부장에 취임했다.
“그간 여성 CEO가 배출되지 않은 것은 여성의 사회 진출 시기가 늦고 여성의 수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지 능력 부족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여성 간부들의 비율이나 지금 들어오는 신입사원의 여성 비율을 보면 조만간 훌륭한 여성CEO가 배출될 거라 기대합니다. CEO에는 성 차별이 없습니다. 업무능력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그는 “여성 대표보다는 영화와 문화콘텐츠 사업에 열정과 사랑을 갖고 있는 글로벌 엔터테이너로 불리고 싶다”는 야무진 각오를 밝혔다.
글·최호열 기자
| ‘금녀의 벽’ 허문 최초의 여성들 이태영 변호사, 양승숙 장군, 이소연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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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엔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2003년 강금실 씨가 첫 여성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데 이어, 전효숙 씨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다. 이듬해인 2004년엔 김영란 씨가 대법관이 됐고, 이영애 씨도 춘천지방법원장에 임명되며 첫 여성 법원장에 올랐다. 가장 남성적인 조직인 군에서도 여성의 도전은 이뤄졌다. 1991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군무관이 된 이은수 씨는 2005년 군사법원장에 올랐다. 2001년엔 양승숙 씨가 별을 달며 ‘여성 장군’이 탄생했다. 1981년 김복선 씨가 첫 여성 헬리콥터 조종사가 된 데 이어, 2007년엔 하정미 대위가 KF-16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조종사에 대한 여성의 도전은 민간항공에서도 이어져 지난해 홍수인 씨와 신수진 씨가 민간항공 여성 기장이 됐다. 여성 장관은 건국 초대 내각(임영신 상공부 장관) 때부터 꾸준히 존재했다. 오히려 차관 승진의 벽이 더 높아 2001년에야 최초로 김송자 씨가 노동부 차관에 임용됐다. 2006년 한명숙 씨가 제37대 국무총리에 임용되며 첫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1973년 여성 최초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은 1995년 첫 여성 민선시장에 당선됐다. 외무고시의 벽을 뚫은 첫 여성은 김경임 전 튀니지 대사다.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는 1996년 핀란드 대사로 부임하며 첫 여성대사로 기록됐다. 최초의 여성 경찰서장은 1945년 수도경찰서장에 취임한 양한나(양귀념) 씨였다. 두 번째 여성 경찰서장은 40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1998년 옥천경찰서장에 취임한 김강자 씨가 그 주인공이다. 최효숙 씨는 지난해 청주여자교도소장에 임명돼 첫 여성 교정기관장이 됐다. 이밖에도 강은옥 씨는 2000년 기관사 등용시험에 합격해 최초의 여성 철도기관사가 됐고, 윤하나 씨는 1999년 비뇨기과 전문의가 되어 또 하나의 벽을 허물었다. 2000년 연세대생 정나리 씨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남녀공학 대학에서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1993년엔 지현옥(등반대장), 최오순, 김순주 씨가 여성으로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 정상을 정복하기도 했다. 이소연 씨는 지난해 4월 우주정거장에 11일간 체류한 최초의 한국인 우주인이 됐다. 이제 남성을 넘어 여성이 최초인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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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