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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기고 - ‘비폭력 실현’ 英 의회의 힘


 

7월 17일로 대한민국 헌정사가 시작된 지 어느덧 61년이 됐다. 헌정사가 시작됐다는 것은 자의적 통치에서 법에 의한 통치로 전환됐음을 의미한다. 법에 의한 통치가 시작됨으로써 법을 만드는 입법부인 국회는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법은 한 사회의 옳음(정의)의 근거가 되고 이에 따라 모든 공적·사적인 행위를 규제 혹은 처벌하면서 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 나간다.
 

그러나 옳음이라는 것은 절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주관적이며 가치관에 의한 판단의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간에 완전한 만장일치를 얻어내기란 아주 어렵다. 특히 정치가 전문가의 전문적 판단 영역이 아니라 국민의 가치관에 의한 선택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집단 간의 무한갈등을 잠정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 정치의 속성이며 그것이 입법을 둘러싼 갈등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정치적 갈등, 입법을 둘러싼 갈등의 또 다른 속성은 폭력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법에 의한 지배를 이룬 동시에 법을 통해 폭력이 행사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그래서 의회는 기본적으로 갈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러한 갈등이 폭력화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장치들을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장치들은 폭력을 배제하는 다양한 수단이지만 이는 결국 구성원의 자발적 의지와 동조가 없으면 행사가 불가능한 수단들이다. 즉 폭력적으로 비폭력적인 의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비폭력적인 의회를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회는 이러한 장치들에 있어서 한국 국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우선 영국 의사당에 들어가면 여야 의원이 앉는 벤치 앞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다. 이것은 국회의원들이 발언할 때 그 선을 넘을 수 없다는 약속이다. 이런 선이 필요했던 이유는 의원들이 의회 내에서 워낙 격렬하게 싸우다 보니 자칫 그 선을 넘게 되면 상대방을 해칠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의회 역시 얼마든지 폭력적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회는 의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회모독죄’를 두고 있다. 의회모독죄는 의원들의 특권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상대 의원에게 폭력이나 체면을 손상시키는 행동을 했을 때 처벌하기 위한 장치다. 이를 통해 의원들 간의 격렬한 갈등을 해소하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또한 영국의회에서는 의원 간 토론에서 다른 의원을 지칭할 때는 직접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존경하는 ○○선거구 출신 의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다. 의장이 의원 이름을 직접 부른다는 것은 곧 징계 처분함을 뜻한다.
 

이러한 호칭을 통해 최소한 감정적 말싸움의 요소를 덜어 갈등이 폭력화하지 않고 건전한 토론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기본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많은 장치들, 즉 폭력을 배제한 갈등의 표출을 돕는 장치들은 영국의회가 오랜 세월 격렬한 폭력적 갈등을 겪으며 합리적 해결방안을 모색한 결과다.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폭력을 배제하는 영국의회에 ‘큰’ 폭력적 사건이 1980년대에 발생했다. 이는 한 노동당 의원이 ‘메이스(Mace·영국 하원의장의 직위를 나타내는 긴 막대기)’를 테이블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일이다.
 

당시 집권당이던 영국 보수당은 인두세를 개정해 가구당 내던 세금을 집안에 사는 사람의 수대로 징수하도록 고쳤는데 이것이 너무 심하다 하여 다시 수정하자는 논의가 진행되면서 하원은 여야 간의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연일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때 야당이던 노동당의 도널드 브라운 의원은 흥분 끝에 의장석 앞까지 나가서 메이스를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에 여야 간 총무회의에서는 브라운 의원의 사과문 낭독으로 마무리하려 했으나 브라운 의원이 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기변명을 앞세우자 의장은 크게 반발했다.
 

결국 브라운 의원이 사과문을 낭독했지만 말미에 자기변명을 늘어놓자 급기야 의장은 브라운 의원의 퇴장을 명령했다. 브라운 의원의 무례한 행동은 보수당은 물론 노동당 동료 의원들의 격분을 샀다. 메이스를 던지는 비신사적인 행동은 노동당의 체면을 크게 실추시켰다.
 

이 때문에 진행 중이던 인두세 개정토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던 노동당의 입지도 크게 손상됐고, 의회에서 쫓겨난 브라운 의원은 노동당 지도부로부터 20일간의 권한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20일간 국회 출석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 역내에도 들어갈 수 없었으며 의원 특권 일체를 박탈당했다. 더 나아가 노동당은 그를 3개월간 노동당 소속 의원의 통제에서도 해제했다. 이는 3개월간 당 소속 의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영국 의회정치의 수준과 품격을 한층 높인 이 사건은 의회 내 폭력사태에 대해 의장과 정당, 의원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영국의회는 이처럼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의회 내의 활동에서 폭력을 배제하려고 노력해왔다. 폭력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그 폭력이 크든 작든 간에 철저하고 단호하게 대응해 폭력을 근절했다. 영국의회의 이러한 노력의 밑바탕에는 비록 가치관을 달리하고 의회 내에서 정쟁을 벌이는 상대지만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의회주의의 기본 사상이 내재돼 있다.
 

한국은 이제 열여덟 번째 의회를 경험하고 있다. 물론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 비해 짧은 헌정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폭력 방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젠 폭력을 방치하거나 허용하는 의회문화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공감대를 형성할 때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르고 폭력이 난무하게 되면 건전한 토론을 통한 입법은 불가능하다. 폭력은 결국 상대에 대한 예의의 부재에서 나온다. 한국 헌정사 61년을 돌아보면서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중에서 출발하는 의회 운영이 결국 폭력 없는 의회, 건전한 토론이 가능한 의회를 이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다.
 
 

글·김민정(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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