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중도실용주의를 ‘정부의 근간’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따뜻한 시장경제를 강조하면서 친서민정책을 부각시키는 대통령의 행보가 의욕적이다. 이는 소수 특권층을 위한 정권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집권 2년차 국정 운영의 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출범 이후 이어진 ‘고소영 정권’ 논란이나 극심한 사회갈등 등을 감안하면 이런 정책전환은 사실 때늦은 것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당시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중도실용 노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가 지난 1년 반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복원하려 하는 중도실용주의는 앞으로도 정권의 성패를 가르는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예상했던 대로 중도실용론은 좌우의 십자포화를 받고 있다. 우파에서는 변절론이 제기되고, 좌파로부터는 ‘쇼하고 있다’는 비아냥이 쏟아진다. 이런 냉소적 반응은 좌우의 극단을 경계하는 중도에게는 운명에 가까운 것이므로 크게 괘념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도실용론이 임시방편의 수사(修辭)에 그치지 않고 내실을 갖추려면 일정한 개념 정리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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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 국정철학으로 내세운 것이 ‘창조적 실용주의’였다. 원래 실용주의는 유럽의 계몽주의가 미국사회에 유입되면서 아메리카 신흥 중산층에 맞는 유용성의 원리로 뿌리내린 것이다.
유럽적 보편성과 미국적 구체성을 미국 풍토에 맞게 통합한 실용주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실천 가치를 갖지 못한 관념과 사상에 대한 근본적 불신, 다양성 중시,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존중, 역사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창조적 실용주의라는 ‘표어’는 참모들이 입안했겠지만 이것이 국정철학으로 격상될 수 있었던 데는 실질과 성과를 중시하는 최고경영자(CEO) 출신 이명박 대통령의 선호도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주창한 ‘이념에서 실용으로’도 이런 맥락에 서 있다.
그러나 창조적 실용주의의 내용을 보면 이명박 정부 초기 정책 추진의 압도적 가중치는 경제 살리기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는 당시 상황이나 국민적 여망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문제는 여기서의 ‘경제’가 대기업과 가진 자 위주의 발전국가적 경제성장을 지향했다는 데 있다. 분배와 통합 대신 성장과 발전이 정권 차원의 일차 목표로 제시됐고 ‘신발전체제 구축’이 ‘국정 목표’가 되어 한국형 신자유주의라는 강력한 이념으로 전화됐던 것이다. 실용주의의 이념화라는 역설적 상황이 그 산물이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이명박 정부가 겪은 시행착오는 상당 부분 이런 역설적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국민 전체를 대표해야 하는 민주정부가 소수 기득권층만을 위하는 정부로 각인될 때 ‘날개 없는 추락’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국정철학을 창조적 실용주의에서 ‘통합형 자유주의’로 바꾸고 중도실용을 내건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무거운 성찰의 소산일 터이다. 통합과 소통을 표방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며 교육 양극화를 시정하고 대학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려는 등의 전방위적 노력은 일단 방향을 잘 잡은 것이다. 발전과 성장도 중요하지만 중산층을 두텁게 하고 서민층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중도실용론에 대해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임을 표방하는 민주당이 격렬하게 반발하는 반응 그 자체가 중도실용론의 위력을 보여준다. 현 정부를 ‘독재정권이며 유사 파시즘’이라고 매도해온 여러 야당과 진보진영이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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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실용주의가 단순한 수사에 머무르지 않고 정책 추진이라는 내실을 획득할 때 얻게 될 정치적 위력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도실용이 ‘뿌리 없는 기회주의이며 죽도 밥도 아닌 잡탕에 불과하다’는 보수우파로부터의 공격에 대해서도 중도실용론은 의젓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극우나 극좌를 멀리하는 중도실용주의가 우리 헌법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1조에서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며 제4조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한다”고 선포해놓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민주공화정을 국가의 정치적 뼈대로 삼은 것이다.
이어 헌법 제119조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규정하고 있다. 제123조의 조항, 즉 지역 간의 균형발전과 지역경제 육성, 농어업과 중소기업 보호 및 육성 등에 대한 국가 의무는 그 연장선에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공화정의 원칙을 통합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헌법 제119조)하는 것과 분배정의와 경제민주화의 정신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게 대한민국 헌법정신이라는 것이다.
중도실용주의가 왜 우리 헌법가치에 충실한 입론인가. 그 이유는 정치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극우나 극좌 모두 자유민주적 공화정의 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중도는 극우와 극좌 사이에서 눈치 보며 부화뇌동하는 절충주의나 기계적 중간점이 아니라 자유민주적 공화정의 근본질서를 굳게 존중한다는 대전제 위에서 작동하는 실천방법론이다. 이는 실용주의가 결코 줏대 없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과학적 합리성 앞에 열려 있으면서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오는 구체적 실감을 중시하는 실사구시의 태도인 것과 비슷하다.
중도실용주의는 시의적절한 담론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의 여부다. 만약 중도실용을 정략적 표어로만 구사한다면 이명박 정부의 앞날은 어두울 것이다.
그러나 중도실용이 제대로 구현될 때, 즉 정부가 공공성에 충실하고 민의를 경청하며 법치주의를 지키고 천하의 인재를 고루 뽑아 시민 모두를 위한 국정을 펼 때 나라의 앞길에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글·윤평중(한신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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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