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북한 안내원 “남북 상봉의 첫 서막”
1일 오전 10시 55분쯤. 북측 출입사무소(CIQ) 앞마당
취재단 선발대 11명을 태운 북측 버스가 시동을 걸었다. 북측 안내원 두 명이 동승했다. 이들은 “조평통에서 통일사업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오전 10시 55분쯤 북측 CIQ를 출발한 버스는 군사분계선과 개성공업지구를 통과한 뒤 개성 시내에 들어갔다.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바삐 움직이는 주민들의 모습이, 다소 남루하긴 했지만 낯설지 않았다. 어떤 이는 5,6층 높이의 건물벽에 매달려 창틀을 새로 설치하고 있었고, 또 다른 이는 벽칠 작업에 한창이었다.
시내를 끼고 도는 하천가에는 청년 10∼20명이 제방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떤 주민은 남측 버스에 관심어린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오전 11시 14분쯤. “여기서부터 개성~평양고속도로”라고 안내원이 소개했다. 왕복 4차선 도로에 뿌옇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안개 낀 산자락이 눈앞에 다가왔다.
남측의 국도 수준인 고속도로는 곳곳에 금이 가고 짜깁기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중간중간 비질을 하거나 반대편 도로에 자전거를 세워둔 채 쉬고 있는 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낮 12시 16분쯤 서흥군 수곡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분홍색 한복 차림의 여성 접대원(북측에서는 서비스업 종사자를 대부분 ‘접대원 선생’이라고 부른다) 6,7명이 따뜻한 인삼차와 북측이 자랑하는 생수인 신덕샘물로 일행을 맞았다.
오후 1시 30분쯤. 평양의 관문인 낙랑구역 통일거리 입구로 들어서자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고층 아파트와 꽉찬 전차, 울긋불긋한 복장의 여성들이 등장했다. 5년 전 평양을 방문했다는 한 기자는 “거리가 산뜻해졌다”고 말했다. 평양 중구역 고려호텔에 도착한 직후 3층 프레스센터로 직행했다.
공식 방문 첫째날인 2일은 숨가빴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전 7시 46분쯤 청와대에서 대국민 인사말을 한 뒤 오전 9시 3분쯤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통과했다. 취재단은 이 장면을 고려호텔 프레스센터에서 남측 방송을 통해 시청할 수 있었다.

역사적인 평양시내 카퍼레이드
노 대통령 일행은 평양 중구역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은 뒤 20분간 무개차(오픈카)를 타고 모란봉구역 4·25문화회관 앞까지 6㎞거리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공식 환영식이었다. ‘2007 남북정상선언’을 만들어낸 노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대면은 바로 4·25 문화회관 앞에서 이뤄졌다.
필자는 당시 노 대통령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동승한 무개차의 수십m 앞에서 취재용으로 제공된 무개차를 타고 평양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 현장과 평양 시내 중심가를 취재했다. 카퍼레이드 행렬은 인민문화궁전에서 보통문∼종로네거리∼만수동산∼모란봉공원∼천리마동상∼개선문∼우의탑∼영생탑을 거쳐 4·25 문화회관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는 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진달래 형상의 꽃다발을 흔들며 “조국통일”, “환영”, “만세”를 외쳤다. 확신과 신념에 찬 눈길이 잊히지 않는다. 어떤 중년의 여성은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보였다. 대학생 소고(작은북)연주단, 중학생 취주악대, 청년취주악대 등이 주민들 틈에 끼여 분위기를 띄웠다.
무개차에 동승한 안내원은 “육로로 평양에 와서 카퍼레이드까지 하는 일은 상당히 드문, 역사적 사변”이라면서 “통일이 멀지 않았다. 역사의 현장에 같이 있었으니 그때 다시 만나 회포를 풀자”고 감격해 했다. 이 안내원은 남측의 연말 대선에 관심을 보이며 “6·15 정신이 (판단의)기준”이라면서 “6·15 정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통일이고, 아니면 반(反)통일”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2007 남북정상선언’이 새로운 기준이 된 셈이다.
노 대통령의 첫날 일정은 오후 김 상임위원장 면담과 환영만찬으로 마무리됐다.

놀람과 안쓰러움이 교차된 아리랑 공연
사흘째 일정은 방북 일정의 하이라이트였다.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노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의 단독정상회담이 열렸다. 정상회담의 반전을 이룬 노 대통령의 오찬은 첫 번째 회담 직후 유명한 냉면집 옥류관에서 열렸다. 노 대통령이 방북단을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노 대통령의 식전 인사말은 20분 정도 이어졌다. 핵심은 “북측의 체제를 인정하고, 역지사지하는 배려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장에 있던 북측 관계자에 의해 인사말 내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됐다.
오전까지만 해도 지지부진하던 회담은 김 국방위원장이 노 대통령의 ‘진정성’을 보고 받은 뒤 오후 회담에서 급진전됐다는 후문이다.
능라도 5·1경기장에서 관람한 아리랑공연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1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하는 경기장에서 유치원생에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10만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톱니바퀴 돌 듯 집체극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한 안내원은 “기계처럼 착착 맞아들어가지 않느냐”며 자랑스러워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떼가 날갯짓을 하고, 계곡 사이로 차가 달려가는 장면의 카드섹션을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히 연출해 냈다. 군무(群舞)와 기계체조, 훌라후프 공연, 태권도 시범 등에서는 수천∼수만 명의 참가자가 한몸처럼 움직였다.
놀라움과 탄성 뒤로 한편으론 ‘얼마나 고된 훈련이 거듭 됐을까’라는 안쓰러움도 일었다. 어린 학생이 5·1경기장 한쪽 끝에서 특수기구로 ‘인간 대포’처럼 쏘아 올려져 공중으로 커다란 포물선을 그린 뒤 반대쪽 그물로 떨어지는 장면이나 수십m 상공에서 아래쪽 그물을 향해 흔들림 없이 수직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은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이날 공연은 남측의 요청에 따라 김 국방위원장을 찬양하거나 자극적인 내용이 상당 부분 삭제·수정됐다. 북측에서는 학생시절 아리랑공연에 참가하는 것을 본인이나 가족이 평생 명예로 생각한단다. 어린 시절 신체발육이나 유연성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안내원은 귀띔했다.
공연 관람에 이어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남측 주최 답례만찬으로 이날 일정은 마무리됐다.
방북 마지막날인 4일. 백두산의 하늘길과 해주의 바닷길, 신의주의 철길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날이다. ‘2007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이 오후 1시 발표됐다. 고려호텔 3층 프레스센터에서는 선언문 내용을 서울로 긴급 타전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필자를 포함해 기사 전송 역할을 맡은 3,4명의 기자는 스트레이트 기사를 서로 나눠 맡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선언 내용은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메가톤급이었다. 자판을 두드리던 한 기자가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하늘길, 바닷길, 땅길 모두 열다
기사 전송이 끝난 직후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언론 공식 발표를 위해 프레스센터에 들어섰다.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자들 사이에 박수가 터져나왔다. 백 실장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북측의 호텔 출입 통제로 ‘갇힌’생활을 하던 기자들의 얼굴에도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노 대통령은 김 국방위원장이 주최하는 환송오찬에 이어 중앙식물원 기념 식수, 인민문화궁전 앞 환송식 참석을 끝으로 평양 일정을 마무리했다.
환송식에서 만난 안내원에게 “성과가 좋으니 하늘도 좋습니다”라며 말을 건네자 “뜻이 있는 말”이라며 화답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8시 45분쯤 군사분계선을, 이번에는 북에서 남으로 통과한 뒤 남측 CIQ에 도착해 환영식을 겸한 대국민 보고회를 가졌다.
필자는 환송식 기사 전송을 끝내고 오후 늦게 평양을 떠났다. 평양을 벗어나니 이내 캄캄해졌다. 코끝이 찡했다. 차창 밖 어둠 속에서 누군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냐”고 묻고 있었다. “글쎄….” 잠시 머뭇거리다 어둠을 향해 마음속으로 외쳤다. “민족을 보고, 희망을 느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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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