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서울 강서구 가양동 7단지 관리사무소 뒤편. 회색의 컨테이너 건물 옆에 천막이 쳐져 있고, 대기업 택배 회사들의 트럭이 오간다. “김치네! 애고, 왜 이리 무거워?” “그래도 오늘은 가벼운 게 많은편이야.”
소란스러운 하차 작업이 한창이다. 이곳은 까치택배. 50대 이상 은퇴자 20여 명이 만든 택배회사다. 여느 택배회사와 다른 점은 직접 주문을 받아 배달하는 게 아니라,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오는 대형 택배회사들의 물품을 건당 8백원씩 받아 집마다 배달하는 것이다.
대형 택배사 입장에서는 아파트 집마다 배달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고, 노인들은 짧은 이동거리에서 택배를 하면서 수익도 올리는 것이다.
이곳의 택배기사들은 모두 취재에 익명으로 응했다. ▲군인 출신인데 아픈 아내를 위해 연금을 일시불로 타서 쓴 뒤 매달 들어가는 수십만 원의 약값 때문에 나온 이모(68)씨 ▲공무원 출신으로 오랜 기간 투석 중인 아내 병구완을 하다 카드 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돼
버린 류모씨 ▲외국계 회사에서 총무과장까지 지냈지만 40대 후반에 퇴직 후 다시 돈벌이 나온 정모씨 등이다.
![]()
우리 사회에 장수 현상이 길어지면서 노후 준비가 안 된 노인들의 현주소다. 경력은 상관없다. 이 회사를 만든 공무원 출신인 송정의(71)씨는 “연금 등 각종 노후 준비가 안 된 노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참신한 실버 비즈니스 모델들이 많이 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0세 인생’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는 기존의 70세 인생, 80세 인생의 시간표에 맞춰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 시간표를 작성하고 여기에 적응하느라 비상(非常)이다.
은퇴 후 삶의 기간이 예상보다 휠씬 길어지자, 그나마 준비했던 노후 자금마저 바닥을 드러내 고민하는 ‘장수(長壽) 리스크’도 현실화 되고 있다. 준비 안 된 장수 노인들은 더욱 절박하다.
대기업체 간부 출신들도 ‘남 모르게’ 택배기사, 경비직 일 등에 도전한다. 교장선생님 출신의 경비, 청소부 등도 등장했다. 100세 시대엔 은퇴 후 삶이 여생(餘生)이 아니라 ‘제2의 삶’ ‘제3의 삶’이기 때문이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장수 리스크(0.87)는 미국(0.37) 일본(0.35) 영국(0.33)보다 세 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장수 리스크란 예상치 못한 은퇴 후 기간을 예상한 은퇴기간으로 나눈 것으로, 0.87이란 예상했던 은퇴기간보다 87퍼센트 더 긴 은퇴기간을 실제로 산다는 뜻이다. 손성동 미래에셋 이사는 “장수 리스크가 높은 사회의 고령자들은 그만큼 경제적·정신적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갤럽과 <조선일보>가 전국 1천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노후준비를 위해 국민연금이 아닌 별도의 재테크를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절반 가까이(44.1퍼센트)가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
은퇴 후 살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경제적 준비를 여전히 소홀해 장수 리스크에 많이 노출돼 있는 것이다.
경기도 구리 토평동에서 10평 남짓한 치킨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오모(52)씨. 그는 2008년 9월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건설사 임원이었다. 퇴직 후 건설사의 해외법인 등의 관리직 취업을 원했다. 나름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정은 달랐다. 회사 있을 때 우습게 본 중소기업들도 그를 외면하기 일쑤였다. 우선 나이가 많다고, 원하는 연봉이 높다고 외면했다. 좀 더 알아보니,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줄을 서 있다고 했다. 당장 고등학생인 두 딸과 아내 얼굴이 어른거렸다. 2009년 1월 아파트 경비직에 도전했다.
24시간 근무하고 하루 쉬는 격일제였다. 월급은 1백만원. 하지만 석 달쯤 하다 보니, ‘체면’이 문제였다. 직장 후배와 닮은 사람이 지나가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창 민감할 두 딸도 아빠가 경비 일을 한다는 얘기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빠 그런 일 좀 안하면 안되나요”라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결국 창업을 하기로 했다. 그해 6월이었다. 퇴직금 2억원과 35평 아파트를 담보로 5천만원을 대출받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7천만원을 더해 총 3억2천만원을 마련했다. 하지만 요즘 경기가 안 좋아 마음을 졸이고 있다. 오씨는 “100세 인생이라 하는데 절반인 50줄에 내 경쟁력이 사라진다는 생각에 참 힘들다”고 말했다.
35년간 교직에 있다가 교장으로 은퇴한 안모(68)씨. 그는 지난해 12월 19일이 아파트 경비로 일한 지 꼭 3년째다.
연금(3백만원 정도)으로 생활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지만 몸은 건강한데 할 일 없이 시간 때우기가 너무 힘들었다. 정년퇴직 후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딸을 도우러 학원 차량 운전도 1년이나 했다.![]()
그나마 학원 경영이 어려우니, 옆에서 지켜보기도 힘들었다. 그만두니, 어디 비빌 언덕도 안 보였다.
그래서 찾은 게 지금 아파트 경비 일이다. 안씨는 “처음엔 체면이 걱정됐는데, 이제는 그런 것 없다”면서 “하루 24시간 격일제로 근무하면서 연봉도 1천2백만원”이라고 말했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강창희 부회장은 “100세 인생의 새로운 인생 설계는 오래 사는 위험, 장수 리스크 관리에 있다”면서 “무엇보다 현역 기간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며, 인생 2모작, 인생 3모작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 방하남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사회에 55세 이상 은퇴자 중 연금 혜택을 못 받는 사람이 무려 75퍼센트가 넘는다”면서 “100세 시대 최고 복지는 일자리이며, 정부는 고령자들이 노동시장에 최대한 머물면서 일하게 하는 것이 국가의 복지 부담도 더는
일석이조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