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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PART1 | 명사 4인이 말하는 추석의 추억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난 나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남들보다 덜하지만 추석날 가족과 함께 명절을 지낸 추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그리고 3남 3녀인 우리 형제자매들…. 이렇게 4대가 함께 살아서 그런지 항상 집안이 북적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추석이 되면 할아버지는 한학자답게 절차와 격식을 꼼꼼히 챙기셨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그다지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았지만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실컷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추석에는 한복을 입고 송편을 빚어 성묘를 가고, 친척 어르신들로부터 선물을 받고 좋아했던 일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올해에는 두 딸이 미국에 있어 친정 식구들과 추석을 보낼 것 같다. 성묘도 가고 형제들과 그동안 못 나눴던 이야기꽃도 피울 예정이다.

옛말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풍성한 한가위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 같다. 최근 경제 사정이 안 좋아 살기 힘들다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기적을 이룬 국민으로서, 그리고 베이징올림픽에서 세계 7위를 차지한 저력이라면 충분히 이런 어려움쯤은 극복하고도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풍성한 한가위만큼 풍성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다시 한 번 전열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다.




추석 명절 하면 서울 도봉산 망월사 계곡에서 밤을 줍고 솔잎 따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명절 때나 돼야 떡 구경, 고기 구경 할 때니까. 추석 전, 어머님이 송편을 빚고 있을 땐 난 항상 동생들을 데리고 솔잎을 따러 갔던 것 같다. 빚은 송편을 삶을 때 시루 밑에 살짝 깔던 솔잎, 지천에 널린 게 솔잎이었지만 왠지 깨끗하고 푸른 솔잎을 따야 할 것 같아 정성스레 바구니에 담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솥뚜껑을 열었을 때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코끝으로 확 풍기는 솔 향내. 나는 송편 중에서도 볶은 깨와 꿀을 넣은 것을 좋아했다.

그땐 망월사 골짜기가 참 맑았다. 산에는 머루, 다래, 밤, 잣, 안 나는 게 없었다. 이맘때가 되면 아침이면 밤을 줍기 위해 일찍 일어나 산 중턱을 헤매고 다녔는데…. 요즘 산에 다니다 보면 도토리, 상수리 열매를 줍는 분들이 많다. 해거리를 하는 도토리는 올해가 풍년이라 등산로마다 산 열매가 지천인 것 같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성인이 되고 나서는 한국에서보다 히말라야에서 맞이하는 추석이 더 많았던 것 같다. 1985년 처음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하고 난 후, 거의 매년 봄, 여름 등반을 떠났으니까. 등반 기간 중 명절이 포함되면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미리 제수 음식을 장만해 둔다. 현지에 가서 나물도 무치고 정성껏 준비를 해서 제사를 모시는데, 그날만은 전 대원들이 목욕재계하고 라마 제단 앞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히말라야에서 라마승의 도움을 얻어 제사를 지내는데, 그때는 참 미안한 생각뿐이다. 선친들에게 미안하고, 처자식에게 미안하고, 같이 간 대원들에게 미안하고. ‘명절날에 내가 여기 왜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렇게 여러 번 겪다 보니 오히려 밖에서 맞는 명절이 편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산 아래에 있으면 여기저기 인사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SET_IMAGE]5,original,left[/SET_IMAGE]나의 고향은 평안북도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추석 때가 되면 수일 전부터 집에서 어머니가 송편과 부침개를 만드셔서 이웃에 가져다 드리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그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신나던지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이북에서는 의식주 중에서 무엇보다 먹을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먹을거리가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오곡백과가 풍성한 추석에는 너 나 없이 나와 내 가족이 먹을 것보다 더 정갈하고 맛깔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으며 정을 키웠다.

어릴 적 아버지는 광산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광부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말이 있어서 말을 관리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었다. 명절이면 말꾼 할아버지가 말 위에 나를 태우고 멀리 외갓집까지 데려가 인사를 드리게 하던 생각이 난다.

요즘에는 추석 차례상 차림이 번거로워 인터넷을 통해 차례상을 통째로 주문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 옛날 우리 어머니들께서는 부모, 자식, 친지를 먹일 음식과 그들을 입힐 옷을 밤을 새워 만들면서도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 인상 한 번 찌푸리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고 놀라울 뿐이다.

아직도 명절이 되면 이북에 남아 있는 생사도 모르는 가족의 안부가 그립고 그분들의 체취가 느껴져 마음이 흔들린다. 나는 내 자식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있고 그들의 마음에 무엇을 심어주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가정의 뿌리와 가풍을 어떻게 알려주고 가족간의 화합을 이끌어낼 것인지는 내 책임이고 몫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60년을 맞는 올해 우리의 민족 최대 명절인 중추절에는 우리 가정에서부터 가족간의 화합과 소통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살맛 나는 우리 가정, 우리 사회, 우리 국가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얼마 전 끝난 베이징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국민들에게 선물한 그 큰 자긍심과 행복의 불씨를 이번 추석에 더욱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가족과 국민 모두가 화합하는 시간을 만들면 어떨까 싶다.




‘속 눈썹이 긴 여자아이.’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지인들이 맨 먼저 떠올리는 말이다. 어린 시절 나의 고향 경기도 광주(廣州)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영화를 위해 바삐 떠나온 고향의 기억이, 나이가 들면서 더 애절해진다.

나는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는 우체국에 다니셨는데 넉넉하지는 않은 살림이었지만 집안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어릴 적 추석은 실컷 먹고 즐길 수 있는 명절이어서 좋았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가족들을 따라 성묘도 하고 추석놀이(?)를 하시는 어르신들을 참견하다 혼쭐이 난 적도 있다.  그런 추석의 향수가 새겨져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추석을 맞는 기분은 남다르다. 마치 생일을 맞은 것처럼 설렘이 앞선다.

[SET_IMAGE]4,original,right[/SET_IMAGE]올 추석에도 그동안 자주 하지 못한 일가 친척들과 함께할 것 같다. 지금 광주에는 가까운 친척이 살지 않아 가보지는 못하겠지만 멀리서나마 옛 추억을 더듬을까 한다.

그리고 2006년 돌아가신 신상옥 감독의 묘소도 둘러볼 계획이다. 경기도 안성 천주교 묘지에 모셔져 있는 신 감독의 묘소는 매달 찾아뵙고 있지만 한가위니만큼 더 깔끔하게 벌초를 해야 할 것 같다.

올해는 큰 일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사단법인 天馬 신상옥 감독 기념사업회’ 일이다. 지난 8월 13일 신상옥기념관 건립을 위해 양해각서를 교환해 앞으로 진행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또 지난 8월 9일 공주 천마 신상옥 청년영화제도 무사히 마쳤으니 올 겨울에는 신상옥 감독 영화작품 사진전을 열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나야 될 것 같다. 이래저래 올 추석은 신 감독의 못다한 영화 열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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