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담배 있습니까?”
11월 24일 오후 2시 30분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의 대형 찜질방 ‘인스파월드’ 건물 앞 주차장에서 마주친 연평도 주민 라재경(45) 씨는 한숨을 내쉬며 뭔가 속에 있는 말도 함께 뿜어내고 싶은 듯 연신 담배를 찾았다.
인스파월드 측은 따로 방을 마련해 연평도 주민들이 당분간 찜질방 시설도 함께 이용하며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라 씨는 일단 찜질방에 도착한 뒤, 모친과 아들을 서울의 고모 집으로 보낸 다음에야 거친 숨을 돌렸다. 연평도 포격사건 후 24시간이 지난 느낌은 어떨까. 라 씨는 “눈앞이 하얗더라고요. 할머니들이 기름을 집에 저장해 두거든요. 그게 발화가 돼서 펑펑 터지는데 여기가 어딘가 싶더라고요”라고 했다. 그의 말에서는 당시의 긴박감이 절실하게 묻어났다.
라 씨는 대피소로 피신해 불안한 밤을 뜬눈으로 보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특히 30여 년 전 만들어놓은 대피소를 정말 대피 용도로 이용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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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대피소를 개·보수할 때까지도 잘 몰랐죠. 이번에 처음으로 대피소로 들어가 밥 구경조차 못하며 있어 보니 북한과의 ‘거리’를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라 씨는 포격이 멈춘 뒤 마을에 떨어진 포탄 탄피까지 확인했다. 정말 포탄이 연평도에 떨어졌는지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육안으로 본 탄피의 크기는 80센티미터 정도. 탄피 무게만 4킬로그램 가까운 중량이었다. 그제야 보통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막상 그 순간엔 덤덤하더라고요. 이젠 오히려 김정일한테 다시 한 번 그 당시를 재현해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예요. 남 말을 잘 안 듣는 그들이니까 그렇게 해도 또 쏘지는 않겠죠.”
그 시간 찜질방 2층 식당에서는 연평도 주민 50여 명이 만 하루 만에야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따끈한 미역국에 밥을 가득 말아 김치, 취나물, 오징어무침 등 밑반찬을 얹어 ‘후루룩’ 허기를 채웠다. 하지만 식당 구석에 앉아 있던 차상익(75) 씨는 밥 몇 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 결국 수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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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고 작은아들이 청주에 산다는 차 씨는 11월 23일 오후 아내 김선순(71) 씨의 김장을 도와주다 황급히 집을 뛰쳐나왔다. 6·25전쟁으로 고향인 황해도에서 피난을 내려와 연평도에 뿌리내린 지 60년. 아직도 시야 너머로 보이는 고향에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번 포격으로 그나마 북한에 대해 얼마 남아 있지 않던 그리움과 기대감이 원망으로 변했다.
“천안함 때는 함대잖아. TV 보면서 설마 민간인들한테까지 그러겠냐고 생각했지. 정말 쟤네(북한군)들은 사람도 아니야. 사상이 다르면 자기 가족까지도 총, 포로 쏘는 놈들이니 무슨 말을 하겠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도 계속 성사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언젠간 만날 수 있겠구나 기대했는데 저놈들 때문에….”
차 씨는 연평도 터전까지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앞으로도 연평도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말도 못하지. 제2의 고향인데. 막상 떠나오니 연평도 생각이 많이 나. 그런데 앞으로 북한은 우리가 먼저 싸움 걸었다고 둘러대면서 연평도를 또 노릴 수도 있지 않겠어? 이러면 연평도가 사라질 수도 있어. 주민들이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어. 그러니 정부가 빨리 안정을 찾아줘야 해. 주민들도 바짝 긴장해야 하고.”
바닷가에서 굴을 따다 피신했다는 최 씨(72) 할머니는 “6·25 피난 때보다 더 무서웠다. 해병대원들이 있어 쉽게 넘어오지 못했던 저들이 정말 미쳤다 보다”며 편히 연평도로 들어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연평도에 대한 애착만큼은 변함이 없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크게 놀랐어도 연평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난생처음 포탄을 보고 놀랐던 박사빈(11) 군은 당시 상황을 묻자 굵은 눈물부터 주르르 흘렸다. 박 군의 부친은 해병대 연평부대 박상찬 상사. 사고 직후 아버지와 연락이 되지 않았던 탓에 누가 연평도 이야기만 해도 눈물을 흘린다. 그래도 연평도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보낸다.
“아빠가 꼭 연평도를 지켜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하고 형하고 연평도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 아빠를 위해서라면 괜찮아요.”
김규진(14) 군도 “북한과의 상황이 달라져서 빨리 연평도의 학교로 돌아가 선생님을 만나고 수업도 하고 싶다”고 했다.
오후 4시쯤 찜질방 TV에서 뉴스를 통해 연평도의 마을 모습이 계속 방영되고 있을 무렵, 연평도에서 피신해온 어린 소녀들도 TV 화면을 보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와~ 우리 연평도다.” ‘우리 연평도.’ 국민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말이다.
글·유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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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